274page

272 민주장정 100년, 광주·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경 비 선 까 지 동 원 하 여 해 안 을 봉 쇄 한 일 제 는 이 른 바 남 한 폭 도 대 토 벌 작 전(1909.9-10)을 전개하여 전남의병을 초토화하였다. 하지만, 엄청난 타격을 받았음에도 전남지역 의병들은 독립을 향한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즉, 중기의병을 주도하였던 임병찬은 독립의군부의 결성을 주도하였다. 독립의군부는 고종의 밀지를 받아 1912년부터 추진되었는데, 국내에서 가장 큰 규모의 비밀결사였다. 여기에는 의병 출신들이 대거 참여하였는데, 특히 전라도 사람들이 많았다. 1914년 독립의군부 조직이 탄로나자, 임병찬은 1914년 거문도로 유배되었다. 거문도에서의 유배생활은 「거문도일기」에 잘 정리되어 있다. 요컨대, 여수를 비롯한 연해 도서 지역 의병항쟁은 호남의병의 대미를 장식했다고 할 수 있다. (3) 안규홍 의병부대 보성 출신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한 인물들은 적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현재까지 국가보훈처로부터 독립유공자로 서훈받은 사람은 약 50명 정도이다. 그 가운데 한말의병항쟁의 공적을 인정받은 경우가 33명이나 차지한다. 19세기말 한말의병부터 독립협회, 의열투쟁, 국내항일운동, 삼일운동, 광주학생독립운동, 임시정부, 광복군 등 수많은 독립운동 분야가 있지만 보성의 경우에는 의병항쟁에 집중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다음이 국내항일운동이나 7명에 지나지 않으므로 의병항쟁이야말로 보성 독립운동의 상징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보성에서의 의병항쟁은 담사리 의병장 안규홍이 이끄는 의진에 의해 주도되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담사리란 꼬마머슴을 말하는데, 안규홍은 어려서부터 머슴살이로 생계를 이어온 빈농출신이었다. 그러한 그가 어떻게 의병장으로 활동하였으며, 전라도 후기의병의 ‘3대 의병장’으로 회자될 수 있었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3-1) 안규홍의 가계와 인물 安圭洪(1879-1910)은 보성군 보성읍 우산리 택촌에서 태어났다. 337) 그는 조선 중기 유명한 유학자인 安邦俊(1573-1654)의 10대손이라 하나, 그의 집안은 이미 오래 전부터 쇠락한 상태에 있었다. 아버지 安達煥(1826-1882)은 그가 태어난지 3년만에 세상을 떠났다. 소실이었던 그의 모친 정씨는 안규홍이 네 살 때 현재의 보성군 문덕면 법화마을로 이거하였다. 338) 아마도 그의 모친은 남편이 세상을 떠나자 호구책을 마련하기 위해 상당한 재력을 지닌 친척 박제현의 집으로 옮겨간 것 같다. 이후 그는 소년티가 채 가시기도 전에 담사리, 즉 꼬마머슴 생활을 시작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그는 사람들에 의하여 ‘安담사리’라 불리어졌고, 훗날 그가 이끌던 의진을 ‘담사리파’ 월 4일자 「경비선소식」, 신한민보 1909년 9월 22일자 「의병토벌선」, 황성신문 1910년 2월 27일자 「해적체포」 등 을 들 수 있다. 337) 안규홍의 가계에 관한 내용은 안규홍의 행적과 의병활동이 수록된 『澹山實記』(1954)를 중심으로 재구성하였다. 338) 홍영기, 『대한제국기 호남의병 연구』(일조각, 2004), 32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