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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0 민주장정 100년, 광주·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숙소와 일인의 숫자와 활동 내용 등을 파악하기 위해 빗장수로 가장하여 침투한 적도 있었다. 330) 전남 동부지역에서 활동하는 의병들은 위장술에도 능하여 주간에는 흰옷, 야간에는 검은 색이나 茶褐色 옷을 입음으로써 쉽게 눈에 띄지 않았다. 331) 2-2) 일제의 의병탄압과 의병의 대응 여수를 비롯한 전남 동부지역 의병의 활동이 거세질수록 일제의 의병탄압도 더욱 강력해졌다. 일제는 강온책을 병행하였는데, 한편으로는 귀순을 권유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군대와 경찰병력을 증강 배치하였다. 그리하여 전남지역의 의병들은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즉, 의병장 기삼연 김준 김률 등이 무참히 살해되었으며, 일반 의병 수백 명이 전사하거나 붙잡혔다. 332) 그리고 일제는 1907년 12월에 ‘귀순 및 면죄에 관한 조칙’을 발효시켜 의병의 귀순을 적극 권유하였다. 이를 위하여 각 도마다 선유위원을 파견하였으며, 수비대와 헌병대 및 도 군 등의 기관에서도 귀순자를 받아들였다. 일제는 매달 기관별로 귀순자의 숫자를 파악하였는데, 1908년 10월까지 총 8,728명의 의병이 귀순하였다. 경찰서에 귀순한 5,129명 가운데 전라남도의 관내 경찰서에는 고작 65명이 귀순하였을 뿐이다. 333) 다시 말해 전라남도는 의병의 규모와 활동에 비해 귀순에 응하는 의병이 거의 없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자 일제는 강경책을 구사하기 위해 헌병대와 순사대를 대폭 증강하였으며, 전담 토벌대를 편성하여 투쟁력이 강한 의병부대를 끝까지 추적하였으나 기대한 만큼의 효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334) 이에 따라 일본은 강력한 반일투쟁을 전개하는 전남 동부지역 의병을 진압하기 위한 계책 마련에 부심하였다. 335) 거문도의 경우에는 일본인 스스로 자위대를 조직하여 의병의 공격에 대비하기도 하였다. 황성신문 1909년 4월 16일자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주목된다. [거문자위] 지난 11일 光濟號가 거문도에 왔는데 동도 일본인은 군용 보병총 10정 및 탄환을 빌려 서 재류하는 일본인 자위대를 조직하고 동도 보호의 방법을 완비하였다더라. 거문도에 사는 일본인들이 자위대를 조직하여 무장하고서 의병에 대비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효과를 거두지 못하자, 일제는 대규모 군사작전계획을 수립하였다. 이른바 ‘남한폭도대토벌작전’이 그것으로, 일제는 조선에 파견된 보병 2개 연대를 비롯한 육해군 조직을 330) 『편책』, 『독운사』 14, 439쪽. 331) 『편책』, 『독운사』 16, 151쪽. 332) 「편집자료」, 『자료집』3, 560쪽. 333) 『편책』, 『독운사』 12, 698 703쪽. 334) 『폭도사』, 107쪽. 335) 대한매일신보 1909년 4월 22일자 「의병진압협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