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1page

한말의병 269 전북에서 1907~1908년 사이에 활동한 이석용 의병장이 부하로 하여금 1909년 5월에 남해안 일대를 정찰시킨 의도가 무엇인지 알 수 없다. 이석용 의병장은 1910년 일제가 강점한 이후에도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 비밀결사를 조직했다가 발각되어 체포, 순국한 인물이다. 이로써 미루어 보건대 이석용 의병장은 전남 동부와 그 인근 연해 지역에 대한 상황을 파악한 후 이곳을 기반삼아 다시 거병할 의도가 아니었을까 짐작된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정찰활동을 수행 중이던 의병 2명이 체포됨으로써 그의 계획도 수포로 돌아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김성택과 이병현은 모두 草島 출신으로서 완도 해남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유배수 출신 의병장 황준성 휘하에서 활동하였다. 황준성은 전북 진안출신의 유생으로 최익현 임병찬이 주도한 태인의병에 참여했다가 체포되어 완도로 유배된 인물이었다. 328) 그는 10년 유배형에 선고되어 1908년 2월 완도에 정배되었는데, 그곳에서 학동들을 가르쳤다. 1908년말 1909년초를 전후하여 의병출신 유배수들은 漁業法의 시행으로 동요하는 어민들에 의해 의병장으로 추대되거나, 스스로 섬주민들을 불러 모아 의병을 조직하기도 하였다. 당시 의병출신 유배수들은 대부분 완도와 진도 등지에 정배되어 있었다. 그런 까닭에 이들은 주로 완도와 진도를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329) 그런데 완도에서 의병장에 추대된 황준성 의병부대에 김성택과 이병현이 어떻게 참여했는지는 잘 알 수 없다. 아마도 황준성 의병부대가 초도에 왔을 때 가담하지 않았을까 추정할 뿐이다. 한편, 정기채 김원석 박우섭 등은 여수 출신인데, 이들에 대한 행적 역시 잘 알 수 없다. 정기채는 율촌면에서 여수재무서 세무관리의 처단을 주도한 의병이었고, 강승우 의병부대에서 활동하던 김원석과 박우섭은 이장을 처단한 의병이었다. 이로써 이들이 납세거부투쟁과 의병부대의 군수품 조달 임무를 맡았던 것으로 보인다. 나머지 의병의 경우에도 그들의 행적을 파악하기가 어렵다. 여수에서 활동했던 의병장과 의병의 연령은 대부분 20 30대의 청장년층으로서 왕성한 활동으로 연결될 수 있었을 것이다. 전라도 의병의 반일투쟁이 고조되자, 일본측은 아래와 같이 평하였다. 폭도(의병: 필자주)들의 행동은 극히 교묘하여 대낮에는 양민을 가장하고 공공연히 군청 소재지를 배회하면서 관서의 동정을 정찰하고, 만약 좋은 기회를 잡으면 곧 자객적 행동을 감행, 총기 탄약 재화를 약탈하고 혹은 허를 틈타 저격 기습하는 등 그 隱現出沒을 미리 헤아릴 수 없었다(「토벌 지」, 『자료집』 3, 771쪽). 의병의 재빠르고 과감한 기습 공격에 일본측은 거의 속수무책이었다고 한다. 전남 동부지역의 의병들도 일본군경의 동향을 파악하기 위하여 순천·고흥·여수·돌산 등에 밀정을 파견하였다. 예를 들면, 앞에서 보았듯이 이석용 의병부대의 양영만과 박덕삼은 돌산읍내의 주재소 감시초병의 328) 홍영기, 「구한말 전라남도 도서지방 의병에 대한 일고찰」, 『동아연구』 21, 25쪽. 329) 『자료집』 별집 1, 79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