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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6 민주장정 100년, 광주·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4월 현재 경상 전라 연안에 일본인들이 청원한 어업권만 하더라도 약 1만 건이나 되었다는 사실만 보더라도 일본인들의 어업권 침탈의 실상을 가히 짐작할 만하다. 326) 결국 생존권을 위협받는 연해 도서지역 어민들은 일본 어부의 이주를 반대할 수밖에 없었다. 여수를 비롯한 남해안 일대에서 활동하던 대부분의 의병들은 본래 고기를 잡는 어부들이거나 농사를 짓던 농민들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이들은 주민들의 피해를 최소화함과 동시에 주민들의 생존권을 보호하는 일에도 적극적이었다. 그러므로 이들이 조선에 이주한 일본어민이나 농민들을 공격하는 활동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그러한 사례의 하나를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1909. 4) 7일 오전 8시경 돌산군 손죽도의 연안에서 약 40명의 폭도는 동소에 정박하고 있던 일 본 어선을 습격, 香川縣人 和田太郞을 참살하고 동인의 소지금 150원을 약탈하였으며, 어구 어망 을 바다 속에 버렸다(『편책』, 『독운사』 14, 178쪽). 의병들이 남해안에 진출한 일본 어민을 처단하고 있다. 이 사건은 의병이 일본 어민의 조선 진출을 적극 저지하였다는 점에서 일본 어부들에게 상당한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당시 일본 어민들은 조선인 소유의 어장을 불법적으로 약탈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처사에 조선의 어민들이 강력히 반발하였으며, 영광의 어민들은 결사대를 조직할 정도였다. 따라서 의병들은 주민들의 생존권을 보호하는 차원에서 일본에서 이주한 일본 어민들을 자주 공격하였던 것이다. 나아가 여수에서 활동하는 의병들은 연해 도서 지역 주민들에게 자신들의 활동 목표와 방향을 전달하며 협조를 당부하기도 하였다. 우리의 단체는 3척의 배로 행동하는데 1척의 乘組 인원 15 6인 또는 20여 명을 승조하고서 흥양 돌산 해남 완도군 여러 섬의 해안을 몰래 항해하고 일본인을 동해 바깥으로 쫓아내지 않으면 안 될 차제로 결코 동포인에는 피해를 주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의 통과를 일본인에게 알림을 금한다 하였다(『편책』, 『독운사』 14, 414쪽). 이들은 여러 척의 배에 나누어 타고 주로 남해의 여러 섬을 근거지 삼아 활동하고 있으므로 그 사실을 일본인에게 알리지 말라고 당부하고 있다. 그리고 위의 [표]에 보이듯이, 의병들은 재무서원이나 우편체송인을 공격하였는데, 그들이 주민들로부터 세금을 거두었기 때문이다. 당시 의병들은 납세거부운동을 전개하였다. 한국인들이 일본을 위해 세금을 납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의병들은 세금을 거두는 재무서원이나 우편체송인들을 공격하였으며, 납부한 세금을 징발하여 군자금으로 사용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326) 홍영기, 「구한말 전라남도 도서지방 의병에 대한 일고찰」, 『동아연구』 21, 2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