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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말의병 263 이는, 임병찬 등이 동학농민전쟁 당시에 농민군을 방어하는 조직을 운용한 경험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통문을 통해 군율을 엄격하게 시행한다는 점과 옷의 형태와 색상, 武器自擔의 원칙 그리고 貴賤보다는 지략과 용기에 의해 선발한다는 점 등을 천명하였다. 323) 이들이 표방한대로 실행되었는가의 여부를 떠나 양반유생 중심의 의병부대가 군사력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전환되어가는 과정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고 하겠다. 더욱이 최익현 임병찬 등의 의병봉기는 전남 동부지역을 비롯한 전라도 전 지역의 의병기운을 일깨웠을 뿐만 아니라 의병항쟁을 고조시키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하였다. 324) 이로써 보면 1906년 봄을 전후하여 여수와 돌산을 포함한 전남 동부지역에 태인의병에 관한 통문이 유포되었다고 믿어진다. 앞에서 소개한 인용문에 전남 興島에 거주하는 장제세 조안국 장응천 등이 이때 역시 중요한 역할을 맡았으리라 짐작된다. 다만, 이러한 통문을 받은 여수와 돌산 등지의 우국지사를 포함한 지역민들이 어떠한 반응을 보였는지 잘 알 수 없다. 여수를 포함한 전남 동부 지역민 중에 얼마나 태인의병에 가담했는지는 알 수 없다. 이와 같이 여수를 비롯한 전남 동부지역은 1905년까지는 의병항쟁의 소용돌이에서 다소 비켜나 있었다. 그러나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점차 전남 동부지역의 우국지사들이 타 지역의 의병투쟁에 참여하거나 독자적인 의병부대를 조직하여 활동하기도 하였다. 이들의 활동이 널리 확산되지는 못하였지만, 지역민의 항일의식을 고조시키는 데 크게 기여한 것으로 믿어진다. 하지만 여수를 기반으로 활동한 의병부대는 거의 찾아지지 않는다. 그러던 중 1908년 초 여수에서도 의병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하였다. 다음의 글이 그러한 내용을 보여준다. 여수군은 지형상 순천반도로서 시국에 관하여는 當部內中 가장 평온한 곳이었는데 2월 13일 여수군 읍내 동문 외에 의병대장이라 서명한 격문이 첨부되어 있음을 발견하였다고 보고해 왔다. 그 후 경계 를 더하고 있는데 작금에는 이상이 없다(『편책』, 『독운사』 9, 253-254쪽). 1908년 2월 13일, 드디어 여수에도 의병장의 격문이 읍내에 붙여졌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무풍지대나 다름없던 여수에 풍운이 감돌기 시작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격문이 붙은 지 몇 달이 지났지만, 아무런 징후도 포착되지 않았다. 10월에 들어서야 비로소 순천과 가까운 獐島의 일본인 집에 의병 40명이 습격하여 무기 등을 징발해갔다. 이제 여수에서 발생한 반일투쟁의 내용을 표로 작성하면 아래와 같다. 323) 황성신문 1906년 4월 5일자 「全報義通」과 임병찬, 위의 책, 45~46쪽. 324) 홍영기, 「호남의병일백년(35)」, 무등일보 1995년 6월 2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