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9page

한말의병 257 완도군 각 도서에서 활동하는 의병을 정찰하기 위해 정찰대를 2회나 파견하였다. 288) 또한 2월 중순에는 연해지방의 일본인 이주 농민을 보호하기 위하여 강진 城田에 림시헌병파출소를 설치하였다. 289) 일본측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도서지역 의병들의 활동은 좀처럼 수그러지지 않았다. 그러자 다른 지방에 주재하던 헌병대를 차출, 파견하였다. 예컨대, 1909년 5월과 6월에는 京 畿·忠 南 北·平 壤 駐 在 헌 병 보 조 원 들 이 전 남 지 방 에 파 견 되 었 고 아 울 러 헌 병 파 출 소 도 증설되었다. 290) 심지어 거문도에 이주한 일본인들은 스스로 自衛團을 조직하여 자구책을 세우기도 하였다. 291) 지금까지 언급한 일본의 대응책은 전남의 육지의병은 커녕 도서지방에서 활동하는 의병을 진정시키기에도 미흡한 것이었다. 292) 일본측은 보다 근원적인 대책을 세우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의병진압을 위한 地圖를 특별히 작성·배포하고, 전남지역 의병을 偵探하기 위하여 서울에서 헌병대 參領이 파견되어 정보를 수집하였다. 293) 뿐만 아니라 南部守備管區의 전 병력을 보다 강력한 부대와 교체하였다. 294) 아울러 장흥-해남간 警備電話를 가설하였다. 295) 이와 같은 조치들은 일본측이 전남의병을 철저하게 진압하기 위한 사전 준비 작업이라 할 수 있다. 그 리 하 여 대 규 모 군 사 작 전 을 실 행 하 기 위 한 준 비 가 본 격 화 되 었 다. 이 작 전 을 이 른 바 ‘남한폭도대토벌작전’이 그것이다. 이 ‘작전’은 1909년 9월 1일부터 10월 10일까지 약 40일 예정으로 실시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전라남도 의병의 완강한 저항으로 인하여 10월 말까지 연장되었다. 일제측은 이 작전을 아래와 같이 기록하고 있다. 臨時派遣隊 司令官 渡邊少將이 군사령부의 계획에 따라 파견대의 전 병력을 투입하여 전남폭도 토벌을 실시했다. 육지에서는 2개 연대의 용맹한 병력을 배치하여 전북 경계로부터 풀과 나무에 이르기까지 샅샅이 수색하고, 바다에서는 뭍에서 도주하는 잔당과 진도 완도 부근에 배회하는 해 적을 섬멸하려는 계획이다(『暴徒史』, 18쪽). 즉, 이 작전은 전남 의병을 소멸시키려는 목적으로 실시되었으며, 특히 도서지역의 경우에는 288) 『편책』, 『독운사』 13, 139 363쪽 참조. 289) 大韓每日申報 1909년 2월 16일자 「營農者保護」. 290) 皇城新聞 1909년 5월 6일자 「補助員發行」과 6월 26일자 「憲兵派出所增設」 그리고 大韓每日申報 1909년 5월 22일 자 「兵員移送」과 5월 30일자 「憲補派送」. 291) 皇城新聞 1909년 4월 16일자 「巨門自衛」. 한편, 이무렵 일본측은 거문도 부근의 의병을 진압하기 위해 釜山守備隊 의 일부 병력을 파견시킨 적도 있었다(『편책』, 『독운사』 14, 223쪽). 292) 『편책』, 『독운사』 1, 808쪽. 293) 大韓每日申報 1909년 4월 6일자 「剿義地圖」와 5월 21일자 「朴氏歸京」. 294) 『편책』, 『독운사』 14, 498-499쪽. 295) 『편책』, 『독운사』 14, 47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