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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6 민주장정 100년, 광주·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실제로 도서지역 의병들의 일본세력 축출활동은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大韓每日申報 1909년 4월 29일자 잡보 「日漁民被殺」에 全南 木浦地方에는 義兵이 熾盛 (중략) 水産組合所의 調査를 據한즉 昨年 九月 十一日로부터 本年 三 月 一日까지 被殺한 日人이 二十六名이오 家屋 被燒한 것이 三十六戶라더라 라고 있음을 보아 그러하다. 한편, 반일투쟁 외에도 이들은 徵稅를 방해하거나, 친일관리의 처단 및 일진회원의 제거에도 적극적이었다. 그들이 일본세력을 끌어들여 의병활동을 저해하였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도서지역의 의병활동은 1908년 말부터 본격화 되어 다음해 여름에 크게 고조되었다. 283) 당시 이들이 활동했던 지역으로는 완도 해남을 비롯하여 진도 蘆花島 所安島 巨文島 靑山島 餘瑞島 巽竹島 長島 生日島 助藥島 古今島 突山島 등 남부 연안의 도서지방이라 할 수 있다. 284) 2-3) 연해-도서지역 의병에 대한 일제의 대응 도서지방, 특히 완도의 경우에는 1908년 말 의병활동이 본격화되었다. 이에 대해 일본측은 다음과 기록하고 있다. 從來 暴徒의 形跡을 보지 못하였던 莞島는 (중략) 客年 12월 11일 暴徒 14명이 同島郡內面에 襲擊 (중략) 賊勢 점차 증가하여 드디어는 都街에 至하여 在留民을 襲擊하려고 揚言 在留民 居住地內의 偵 察을 하는 等 시시각각 위험이 臨迫하여 在留民 擧皆가 避難을 企圖하기에 至하여 駐在巡査 등도 此 를 保護하여 客月 24일 木浦로 退却하였다(『편책』, 『독운사』 13, 78쪽). 즉, 1908년 말 완도에 의병이 크게 일어나자, 모든 재류 일본인뿐만 아니라 주재순사조차 목포로 퇴각하였다. 이에 앞서 가을에 의병이 들어왔을 때에는 수비대의 병력을 증가시킨 적도 있었다. 285) 이는, 바꾸어 말하면 도서지방의 의병세력이 약했던 초기에는 수비대 병력의 증가조치로도 어느정도 대비가 되었지만, 의병의 세력이 강화되자 결국 철수할 수밖에 없었음을 나타내준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일본측은 완도 방면에 한달 예정의 수비대를 출동시켰다. 286) 이어서 1909년 2월 하순에는 해남에 토벌대를 파견하여 의병 진압에 나섰다. 287) 다른 한편으로 일본측은 283) 大韓每日申報 1909년 7월 3일자 잡보 「海岸警備」 참조. 284) 이들의 활동지역에 대해서는 『자료집』 별집 1, 795 920-922쪽 그리고 『편책』, 『독운사』 14, 413-414쪽 및 『편 책』, 같은 책 15, 521쪽. 285) 大韓每日申報 1909년 6월 2일자 「日人被殺」. 286) 『폭도사』, 86-87쪽. 287) 위의 책, 9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