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7page

한말의병 255 그와 같은 상황을 아래의 인용문이 잘 알려준다. 囊日 全羅南道 觀察使는 同島(莞島 ; 필자)를 巡視하고 島民에 對하여 森林盜伐에 關한 嚴戒를 與한 일이 있으나 依民盜伐을 續行하고 또 曰 莞島의 森林은 日本人의 손에 歸하므로써 島民은 드디어 餓 死하는 外에 不如하다. 日本人과 싸워 戰死하더라도 좋다고 憤慨…… 또 古今島에 있어서의 流配囚 26名은 恒常 暴徒와 氣脈을 通하고 時時로 內報하는 等 間接으로 授助를 與하고 있는 것 같다(『편 책』, 『독운사』 13, 78쪽). 즉, 유배수와 섬 주민 그리고 의병들은 <완도삼림문제>를 계기로 긴밀하게 협조하였음을 알 수 있 다. 요컨대 이들은 함께 반일전선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도서 연안 지방의 의병활동에 대하여 알아보자. 다음의 <표>가 참고된다. <표> 완도 해남 지역의 의병활동(1908. 7-1909. 7) 구분 군대와 경찰 및 그 기구 재무서 또는 공전영수원 우편취급소 체송인 在留日本人 한 국 인 계 상인 어민 수산 조사자 미상 면장 일진회원 교사 기타 莞島 5 1(2) 1(2) 2(1) (3) 1 1 1(2) 11 海南 6(2) 1 1 (1) 2 2 1 2(2) 17 * 숫자는 『편책』 1909년 4月-6月分을 토대로 조사한 공격 건수로, 위의 통계 사실과 중복되지 않은 내용임. 위의 <표>에서 볼 수 있듯이, 완도 해남지역 의병들은 일본 군경과 재류일본인들을 주로 공격하였다. 다시 말해서 반일투쟁에 적극적이었던 것이다. 그것은 이들이 의병에 가담한 배경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믿어진다. 이 점과 관련하여 아래의 인용문이 주목된다. 우리의 團體는 3소의 船으로 行動하는 者인데 1소의 乘組人員은 15,6인 또는 20여 명을 乘組, 興陽 突山 海南 莞島等 諸島의 海岸을 密航하고 日本人을 東海面으로 放逐하지 않으면 안될 次第로 決코 同胞人에는 被害를 주지 않는다(『편책』, 『독운사』 14, 414쪽). 여기에서도 도서지방 의병의 가장 큰 목적이 일본인의 방축에 있었음을 잘 보여준다. 282) 282) 이와 관련하여 다음의 사실도 유의해 볼 만하다. 1909년 4월 全南義兵所의 이름으로 木浦와 그 부근 各面에 檄文이 發送되었다. 내용인즉, 의병 1만 명이 목포를 공격하여 일본인을 죽이겠으니, 한국인은 피신하라는 것이었다(『편 책』, 『독운사』 14, 157쪽과 大韓每日申報 1909년 5월 1일자 잡보 「義將布檄」). 이 계획은 비록 실현되지는 않았지 만, 이것 역시 당시 의병들의 목표가 어디에 있었는지를 잘 나타내준다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