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2page

250 민주장정 100년, 광주·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보아 의병관련 流配囚들과 섬 주민들 사이에 접촉이 이루어졌음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全羅南道 內陸에서 활동하던 의병들이 日本側의 진압을 피해 島嶼 지방으로 피신했었다. 263) 즉, 1908년 봄에 起義한 안규홍과 염재보 등은 일본측의 기습으로 패전한 후, 잠시 섬에 들어가 활동 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이 도서지역은 내륙 의병들의 일시적 활동무대 내지는 은신처로 활용되기도 하였다. 그런데 내륙에서 활동하던 의병들이 도서로 이동, 활동함으로써 섬 주민들은 상당한 영향을 받은 것 같다. 특히 완도를 비롯한 인근 도서 주민들은, 뒤에 다시 언급되겠지만 해남에서 반일투쟁을 전개 하던 심남일 의병부대로부터 고무된 바가 적지 않았다. 이때 도서지역 주민들은 <완도삼림문제>와 어 업법의 시행 등 일본의 경제적 침탈로 말미암아 반일감정이 고조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심남 일 의병부대의 의병활동은 완도·진도 일대에 定配된 의병 관련 유배수들에게도 대단한 반향을 일으 켰다. 後述하는 바와 같이 유배수들이 정배지를 이탈하여 의병에 다시 참여하는 결정적 계기가 된 것 이다. 이들이 1909년 초에 의병에 재차 투신하고 있음이 주목된다. 이 시기는 공교롭게도 <완도삼림문제> 및 어업법의 시행과 거의 맞물려 있거나, 바로 그 직후에 해 당된다. 바꾸어 말하면 연해-도서 지역의 주민들이 일제의 경제적 침탈로 인하여 자신들의 반일감정 을 표출시키는 시기였던 것이다. 이 점은 뒤에서 언급하겠지만 의병활동 면에서 보면 더욱 분명해진 다. 즉, 이들의 의병활동 방향은 대체로 일본의 경제적 침탈에 대항하는 측면이 두드러지기 때문이다. 아래에서 볼 수 있듯이, 일본 어민들이 의병에게 피해를 입고 있음이 확인된다. 우리 토벌대의 엄밀한 검거와 민첩한 소탕으로 인하여 폭도의 대부분은 남방 연해 및 도서로 도 망쳐 同 地方 일대에 있는 우리 어민이 그 참해를 입게 되었다(「討伐誌」, 『자료집』 3, 773쪽.). 264) 즉, 내륙에서 이동해온 의병들과 도서지방 주민 그리고 의병출신 유배수들이 연합하여 일제의 경제적 침탈을 저지하려는 것임을 알 수 있다. 한편, 1909년 所安島(莞島의 남쪽 해상에 위치)에서 토지소유권 분쟁이 일어났다. 원래 소안도 대 부분의 농지는 宮房田으로서, 思悼世子의 5세손인 李埼鎔이 그 收租權者였다고 한다. 265) 그런데 궁방 전의 소유권이 갑자기 이기용에게 이양되자, 소안도 주민들은 1909년에 소유권 반환 청구소송을 제 기하였다. 266) 이와 같은 토지 소유권 분쟁 역시 섬 주민들을 의병봉기에 가담케 하는 요인의 하나가 263) 廉在業, 『蘆月軒遺稿』 제4책, 「從弟在輔行錄」. 264) 「討伐誌」, 『자료집』 3, 773쪽. 265) 朝鮮日報 1927년 5월 17일자 「絶島 唯一의 敎育機關」과 같은 신문 5월 18일자 「所安이 安在?」 그리고 李均永,「해 방의 땅 所安島」, 『사회와 사상』 1989년 9월호 ; 『所安抗日運動史料集』(1990), 125쪽. 266) 위와 같음. 한편, 所安島 주민들의 소유권 반환 청구소송은 13년이 지난 1921년에 해결되었는데, 그 결과 소안도 주 민들은 소유권을 되찾았다. 그것을 기념하기 위해 그들은 1만 4백여 원을 모금하여 1913년부터 운영되어 오던 中和 學院을 小學校로 승격, 인가받는 데에 사용했다고 한다(이균영, 앞의 논문, 12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