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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2 민주장정 100년, 광주·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갑자기 의병장을 잃게 된 김동신 의병부대는 일제의 계속되는 진압작전에 대한 대응책을 강구하였다. 그들은(의병 ; 저자주) 지리산중 인적이 없는 곳에 가옥을 구축하고 장벽을 설치하고 防柵을 만들 고 주식을 저축하여 永久之策을 강구하고 있었으나, 6월 21일 함양 수비대는 심한 곤란을 무릅쓰 고 드디어 그 근거지를 발견하여 총기 탄약을 노획하고 기타는 전부 소각하였다. 그후부터 폭도는 거의 사산하였는데 그 대부분은 경상남도 전역으로 꺼지고 일부는 전라도 방면으로 이동하였다 (『토벌지』, 『자료집』 3, 767쪽). 지리산 깊은 산중에 집을 짓고 장벽과 방책을 설치하고서 그 안에 총기와 탄약 및 주식을 비축하여 영구적인 대책을 세웠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이러한 노력도 허사가 되고 말았다. 일제에 의해 발 각되어 모두 불태워졌기 때문이다. 결국 이들은 경상남도와 전라도의 각처로 흩어지거나 다른 의병부 대로 합류하였다. 이로써 약 1년 동안 지리산을 중심으로 반일투쟁을 이끌어 왔던 김동신 의병부대는 해산되고 말았다. 김동신 의병부대는 호남지방 후기의병의 선구적 역할을 다하였다. 그리고 이들의 활동은 장기항전 전략인 이른바 ‘의병전쟁준비론’에 의해 지리산 중심의 의병기지 건설을 시도했다 는 점에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다. 한편, 곡성에서는 盧仁先(1876-1909)은 盧琳手 盧共壽로 알려져 있는데, 곡성 죽곡 출신이다. 그 는 1907년 11월 김동신 의병에 투신하여 활동하다가 1908년 4월에 독립하여 申正雨와 함께 곡성 구 례 등지를 무대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210) 그후 11월 신정우와 같이 체포되어 1909년 5월에 순국 하였다. 211) 구체적인 내용은 아직까지 밝혀진 바가 없어 아쉬울 따름이다. 4. 전남 남부-연해지역의 의병항쟁 동학농민혁명의 마지막 항전지였던 장흥-해남 등 남부 연해지역에서는 과연 의병항쟁이 어떻게 전 개되었을까. 여기서는 그러한 궁금증을 해명하기 위한 목적이 있다. 기존의 연구에 의하면 이 지역, 특히 장흥-영암 사이에서는 심남일 의병부대가 가장 강력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해남과 완도 등 島嶼-沿海 지역에서는 의병출신 유배수들이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러한 연구성과 를 바탕삼아 정리하고자 한다. (1) 沈南一 의병부대 심남일(1871-1910)의 본명은 守澤, 자는 德弘이며, 212) 南一은 그의 호이다. 그가 의병을 일으키면 서 남일이라 自號했는데, 그는 “남일”을 전남 제일의 首將이라는 의미로 사용하였다. 213) 이러한 그를 210) 「盧仁先 判決書」(刑上 제66호, 1909.4.16) 211) 『구한국관보』 제4387호(1909.5.27) 휘보 참조. 212) 「義兵將沈南一傳」(오준선 찬), 『沈南一實記』 ; 『자료집』 2, 589쪽과 『편책』, 『독운사』 15, 817쪽 참조. 213) 『편책』, 『독운사』 12, 325쪽. 이 글은 홍영기, 앞의 책 제2부 제3장 제3절 심남일 의병부대의 내용을 중심으로 정리 했음을 밝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