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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 민주장정 100년, 광주·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편취급소와 분파소에 대한 공격이 그 신호탄이 된 것이다. 이들은 내장산에서 의병을 일으켜 지리산 으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순창읍을 공격하였다. 194) 그 후 이들은 전라도에서 경상남도 서부지역까지 활동영역을 넓혔다. 195) 김동신 의병부대는 전라북도로부터 지리산을 근거지로 삼아 경상남도의 안의 · 하동 · 함양 등지로 활동지역을 넓혀갔다. 그는 이 과정에서 국가의 위급함과 각료의 秕政을 비 판하고 일본인들을 몰아내자는 내용의 격문을 발송하여 주민들로부터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다. 196) 이 들은 먼저 의병을 빙자하여 민간인의 재산을 약탈하는 자들을 근절시켰다. 197) 그리하여 주민들로부터 적극적인 지지를 받은 것이다. 이들의 반일투쟁이 계속되자, 일제는 경남 진해에 있던 重砲兵隊까지 동원하였다. 작년(1907 ; 필자주) 8월부터 12월에 이르는 기간에는 그 세력이 창궐을 극하였던 김동신이 인솔 한 무리가 그 수에 있어서 가장 많아 각지를 횡행하여 흉폭이 이르지 않는 곳이 없었다. 그러므로 진해만 중포병소 소위는 하사 이하 20명을 거느리고 진주 경찰서 순사 3명, 순검 6명과 함께 하동 군 화개상면 탑촌에 집합한 김동신을 공격할 목적으로 10월 17일 새벽 그곳에 도착하여 격전 분 투 1시간에 걸쳐 副將 고광순 이하 25명을 죽이고 다수의 부상자를 냈다(『편집자료』, 『자료집』 3, 567쪽). 이들을 진압하기 위해 진해 중포병대와 순사대가 합동으로 출동하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전투에 서 고광순 이하 25명의 의병이 죽고 다수가 부상하였다. 198) 곧이어 그들은 김동신 의병부대의 근거지 였던 지리산의 문수암을 불태웠다. 김동신 의병부대가 일본군을 공격할 때 문수암이 거점으로 이용되 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리산에 의병기지를 건설하려는 시도는 상당히 많았던 것 같다. 이를테면, 전남 광양의 의 병들도 지리산으로 이동하였고, 199) 전북 임실과 태인에서 각각 의병을 일으킨 姜在天과 林炳瓚 등의 부하들이 지리산으로 들어갔다. 200) 심지어 청국인들까지 지리산에 의병기지의 구축을 시도하였다. 201) 1907년 후반부터 지리산으로 근거지를 옮겨가는 의병들이 꾸준히 증가하였다. 202) 194) 『편책』, 『독운사』 15, 754쪽. 195) 위의 책, 565-566쪽. 196) 그의 격문은 이 지역에서 상당한 반향을 일으킨 것 같다. 당시 신문에 그가 격문을 보낸 사실을 기사화한 점에서 그 러하다(大韓每日申報 1907년 9월 25일자 「兩湖飛檄」, 10월 11일자 「通文謄上」 및 『京鄕新聞』 1907년 10월 4일자 「의병쟝통문」 등). 197) 이러한 활동은 그의 『문집』에 자주 보인다(3·16·19쪽 등 참조). 198) 인용문에 의하면 일본측은 고광순을 김동신의 副將으로 파악하였다. 이 점은 사실과 다르며, 양자가 긴밀한 연계를 유지하면서 같은 지역에서 활동했기 때문에 그렇게 이해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199) 大韓每日申報 1907년 9월 22일자 잡보. 200) 위의 신문 1908년 2월 27일자 「湖南消息」. 201) 『통감부문서』 10(국사편찬위원회, 2000), 296쪽. 202) 황성신문 1907년 10월 22일자와 1908년 4월 29일자 「地方消息一通」 및 大韓每日申報 1908년 4월 30일자, 1909 년 2월 9일자, 8월 3일자 잡보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