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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민주장정 100년, 광주·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담양의 金重華, 창평의 柳亨魯, 장성의 奇宇善, 능주의 文章烈, 광주의 朴成東, 보성의 文章衡, 나주의 吳仲文, 영암의 申성(木+聖), 강진의 金炳泰, 해남의 金道一, 흥양의 宋年浩 柳希道, 곡성의 趙錫夏, 구례의 林奉春(林春奉), 순천의 朴洛陽 등이다. 14) 이들 접주들은 일정 규모의 동학교도를 관리하거나 人望이 있는 인물들이었다. 15) 그런데 보은취회에 참여한 동학교인과 농민 중에는 전라도 출신들이 숫자적으로 압도적이었으며, 그들은 매우 적극적이고 저항적이었다고 양호선무사 어윤중은 정부에 보고하였다. 16) 그것은, 전라도 지역의 농민들이 정부의 가혹한 수탈로 말미암아 반정부적인 감정이 타도에 비해 더욱 깊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들은 동학의 종교적인 면보다는 정치적인 면에 더 관심이 많았고, 현실의 여러 모순을 제거해야 한다는 의식이 점차 강해져 갔다. 17) 이처럼 수만 명의 동학교인이 참여한 복합상소와 교조신원운동은 정부의 무성의로 인해 기대한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오히려 동학교인에 대한 탄압이 더욱 강화되었으며, 관리들의 탐욕은 농민들의 생존권조차 빼앗아갈 지경이었다. 3) 고부농민봉기와 광주-전남 농민의 동향 수령의 탐학과 이서배의 가렴주구를 집중된 지역은 비옥한 평야에 위치한 전라우도였다. 그 중에서도 수탈이 가장 심했던 지역의 하나가 바로 古阜郡이었다. 고부의 농민들은 처음에 자신들의 억울한 사정을 호소하였다. 하지만 고부 농민들의 호소는 번번히 묵살되었으며, 오히려 진정서를 제출한 대표자를 잡아 가두기까지 하였다. 당시 고부군수였던 趙秉甲은 당시 豊壤趙氏 세도가로서 1892년 말 고부군수로 부임한 이래 갖가지 명목으로 농민들을 괴롭혔다. 예컨대, 免稅를 약속하고서 황무지를 개간한 농민들에게 강제로 세금을 징수하였고, 富民을 붙잡아들여 불효·淫行·雜技 등의 죄명을 뒤집어 씌워 재물을 빼앗은 것만 하더라도 2만량에 이르렀으며, 태인현감을 지낸 그의 부친의 공덕비를 세운다며 강제로 거둔 돈이 1천량이나 되었다. 특히 물의를 빚은 것은 萬石洑 아래에 새로운 보를 쌓아 농민들에게 水稅를 강제로 징수한 것이었다. 18) 이에 농민 1천여 명은 고종 31(1894)년 2월에 동학접주 전봉준의 지휘아래 고부군아를 점령하였다. 이들은 모두 흰수건으로 머리를 동이고 죽창과 몽둥이를 들고서 봉기한 것이다. 이들은 군아에 보관중인 무기를 탈취하고 불법으로 수탈한 곡식을 빼앗아 빈민들에게 분배하였으며, 원성의 대상인 새로운 보를 부숴버렸다. 당시 고부의 농민항쟁은 종전의 ‘민란’과는 다른 특징을 보였다. 19) 즉, 이 사건은 1892-3년의 교조신원운동과 1893년 음력 11월의 沙鉢通文 모의 계획과 서로 깊은 관련을 14) 오지영, 『동학사』 초고본, 『동학농민전쟁사료대계』 1(여강출판사, 1994), 444쪽. 15) 위의 책, 445쪽. 16) 『동학란기록』 상, 123쪽. 17) 이광린, 『한국사강좌』 Ⅴ[근대편], 281∼283쪽. 18) 위의 책, 283쪽. 19) 박맹수, 『사료로 보는 동학과 동학농민혁명』(모시는사람들, 2009), 25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