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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말의병 235 에 집결하여 광양 · 순천을 중심으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163) 또한 고광순은 1907년 2월(음력 섣 달그믐날)에는 남원의 향리 양한규와 연합하여 남원을 공격하기로 하였다. 이를 위해 음력 12월 중순 창평 소재 猪山의 전주이씨 제각에서 의진을 결성하였다. 당시 고광순 의진을 주도한 인물로는 부의 병장 高濟亮, 선봉장 高光秀, 좌익장 高光薰, 우익장 高光彩, 참모 朴基德 高光文, 호군 尹永淇, 종사 申德均 曺東圭 등이었다. 의병장 고광순을 비롯하여 창평의 고씨들이 대거 가담한 점이 주목된다. 하 지만 고광순 의진이 남원에 도착하기 전에 양한규 의진이 먼저 일어났다가 패퇴함으로써 남원을 점령 하려던 계획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창평으로 돌아온 고광순은 1907년 음력 3월에 능주의 양회일, 장성의 기삼연과 의병봉기를 계획 하며 창평 능주 동복 등지를 전전하였다. 164) 이처럼 60노구의 그는 오로지 충의를 신념으로 10여 년 간 고군분투하였다. 그 결과 일제조차 고광순을 ‘호남의병의 선구자’ 혹은 ‘高忠臣’이라 부르며 감 탄할 정도로 호남의병의 활성화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리하여 일제는 그를 최익현 기삼연과 더불어 1906-7년 사이에 가장 대표적인 의병장으로 꼽았다. 165) 그는 1907년 9월 의병전략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였다. 즉, 화력과 훈련 면에서 압도적인 일제 군 경과 맞서 싸우는 방식을 탈피하고서 ‘蓄銳之計(혹은 根據之計)’, 다시 말해 장기항전에 대비하여 일 정기간 銳氣를 기른 후에 전쟁을 불사한다는 전략을 수립한 것이다. 이를 위해 고광순 의병장은 국내 에 항구적인 의병기지의 건설을 추진하였다. 그는 험준한 산으로 알려진 지리산 피아골을 의병의 기 지로 주목하였다. 이는, 중부이북의 의병들이 이른바 北計策을 추진한 것과 비교된다. 166) 그런데 의병들이 지리산을 장기항전의 근거지로 삼으려는 시도는 1907년 중반이후에 추진되었다. 이 러한 전략을 본격적으로 추진한 의병장은 바로 고광순이었다. 아래의 기록이 그러한 사실을 말해준다. (1907. 음) 8월 11일 행군하여 구례 연곡사에 이르렀는데, 산이 험하고 골짜기가 깊었다. 동쪽으 로는 화개동과 통했는데, 그곳에는 산포수가 많았다. 북쪽으로는 문수암과 통했는데, 암자는 천연 의 요새였다. 연곡사를 중간기지로 삼아 장차 문수암과 화개동을 장악하여 의병을 유진시켜 예기 를 기르는 계책으로 삼았다. (고광순은) 대장기를 세우고 깃발에는 ‘不遠復’ 석자를 썼다(『鹿川 遺稿』, 「行狀」). 고광순은 연곡사가 위치한 피아골을 의병의 근거지로 삼아 ‘머지않아 회복한다(不遠復)’의 기치아 래 ‘축예지계’, 즉 예기를 기른 후 항전을 도모하겠다는 구상을 밝힌 것이다. 당시 지리산은 장기항 전의 근거지로 주목받았다. 특히, 전라도의 중북부 산악지대를 중심으로 의병부대를 이끌던 고광순을 163) 『폭도사』, 10 21-2쪽. 164) 『杏史實紀』 권 3, 「行狀」(안규용 찬). 165) 『폭도사』, 8쪽. 166) 柳麟錫, 「與諸陣別紙」, 『毅菴集』 上, 59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