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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4 민주장정 100년, 광주·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3. 전남 북부지역의 의병항쟁 (1) 高光洵 의병부대 1907년 후반이후 전남 북부지역에서는 高光洵과 金東臣이 의병항쟁을 주도하였다. 이에 이들이 이 끌었던 의병부대를 중심으로 서술하고자 한다. 일제는, 폭도의 수괴는 김동식(김동신 ; 저자주) · 고광순 등으로 전라남북도에 있어서 폭도의 선구자였 다(『토벌지』, 『자료집』 3, 703쪽). 라고 파악하였다. 김동신과 고광순 등이 전라도 후기의병의 선구자라는 것이다. 그 중에 고광순(1848-1907)은 호남의 명가로 알려진 장흥고씨로서 창평에서 태어났다. 그는 임진 왜란 당시 의병을 일으켜 금산에서 순절한 의병장 高敬命·從厚 仁厚 3부자의 후손으로 인후의 祀孫 이었다. 그는 19세기 후반까지만 하더라도 참다운 선비로서의 자질을 닦고, 종가의 본분에 어긋나지 않은 삶에 충실하였다. 그러던 중 일제의 침략이 본격화되자 그의 생활에 커다란 전환이 이루어졌다. 그는 일제에 의해 자 행된 명성황후시해사건과 단발령을 계기로 기우만이 주도한 장성의병에 참여한 것이 그것이다. 그는 기우만과 함께 상소문과 통문을 작성하였는데, 광주 장성 담양 순창 창평에 의병을 권유하는 통문을 보내어 장성향교의 창의와 光州會盟에 가담할 것을 촉구하였다. 162) 그는 전기의병이 해산된 이후에도 집안일을 젖혀두고 오직 의병을 일으킬 일념으로 영호남으로 돌아다니며 동지를 포섭하는데 열중하 였다. 당시의 상황에 대하여 그는 “서생의 가슴속에는 저절로 甲兵이 들어있는 법”이라 토로하였다. 한편, 고광순의 사돈이었던 奇宰 역시 장성의병에 참여한 바 있으며, 기재의 아들 기산도는 고광순의 사위였다. 기산도는 이른바 을사5적 처단활동을 전개했을 뿐만 아니라 삼일운동직후 임정의 독립자 금 모금에도 기여한 바 있다. 전기의병이 일부 구성원의 반발과 아쉬움 속에 해산되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의병의 불길이 식은 것 은 아니었다. 1905년 11월 체결된 을사조약을 전후하여 의병의 열기가 되살아났다. 특히, 면암 최익 현은 호남지역 의병의 활성화에 가장 큰 영향을 끼쳤다. 창의를 호소하는 그의 글은 전남 지역의 의병 봉기를 크게 자극하였다. 즉, 고광순 백낙구 李恒善 姜在天 奇宇日 기우만 양회일 등이 각각 창평 광 양 구례 장성 곡성 능주 등에서 의병을 일으키게 된 것이다. 따라서 최익현의 의병봉기는 호남의 의병 기운을 일깨웠을 뿐만 아니라 의병항쟁을 고조시키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하지만 태인의병이 순창에서 패진하여 해산되자 고광순은 백낙구 기우만 등과 함께 구례 中大寺 162) 『鹿川遺稿』, 「通告列邑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