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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2 민주장정 100년, 광주·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각처를 횡행하므로 군수는 크게 이를 두려워하며 자산을 가진 자는 흉흉하여 피난을 게을리 하지 않 고 또 窮民은 속속 彼等의 群에 들어가려고 하는 경향”으로 파악하였다. 아울러 이들의 활동으로 소작미의 징수가 불가능할 정도라고 토로했는데, 이는 부재지주의 소작미 를 군자금으로 징발하였음을 의미할 것이다. 이러한 군자금 확보와 관련된 회계 임무를 그의 동생 박 여홍이 맡았을 것이다. 그러던 중 1909년 2월 하순 박여홍은 덕룡산 전투에서 중상을 당해 체포되었 다가 사망한 것이다. 150) 일제측 기록에는 이들의 활동이 1909년 1-2월에 집중적으로 나타나는데, 그 시기에 가장 왕성한 활동을 전개한 것으로 판단된다. 151) 2월말 박민홍 역시 영암 금산전투에서 전사함 으로써 152) 그의 의병부대는 나성화에 의해 계승되었다. 153) 나성화는 박사화 심남일 전해산 등과 연계 하여 활동하다가 10월에 체포되었다. 한편, 박사화는 심남일 의병부대에서 중군장으로 활동하다가 독립하였는데, 선봉장 申 某, 중군장 김은식 등 1백명 정도의 규모로 활동하였다. 박사화 의병부대의 제1초 십장 김치홍은 그 이전에 심남 일 의병부대의 기군장이었으며, 박민홍 의병부대에서 제1초 십장으로 활동한 점에서 주목된다. 즉 심 남일 박민홍 박사화 등이 유기적인 관계를 맺고 있었음을 확인해주는 사례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들은 나주 남평 소재의 덕룡산 전투에서 연합하여 항일투쟁을 전개하였음을 알 수 있다. 南平郡 竹谷面 船洞에 到着한 바 首魁 朴士化 朴珉洪 姜武京이 引率하는 約 250의 暴徒가 同洞 背 後의 德龍山이라고 稱하는 高地 陣地를 構築하고 있었으므로 直時 射擊을 加하였으나 賊은 天險 의 地利와 多數를 믿고 頗히 頑强히 抵抗하였는데 對戰 三時間 (중략) 射耗彈 334(『편책』, 『독운 사』 13, 412쪽). 1909년 2월 26일 남평 덕룡산 전투에서 박사화 박민홍 등은 심남일 의진의 부대장을 맡고 있던 강 무경과 연합하여 반일투쟁을 전개했는데, 무려 세시간 동안 공방전을 벌였던 것이다. 이 전투에서 박 민홍의 동생 박여홍이 중상을 입고 체포되었다가 이내 사망하였다. 154) 이와 같이 이들은 나라를 구하 기 위해 신분을 초월하여 일본 제국주의 세력을 몰아내고자 노력하였음을 알 수 있다. 당시 박민홍은 시장의 주막 앞에 湖南壯義所 대장으로 격문을 붙여 士農工商이 합심하여 일제를 몰아내자고 호소하 였다. 155) 150) 위와 같음. 151) 박민홍 박사화 등 나주 이족의 의병활동에 대해서는 배항섭, 앞의 논문(2006), 205-213쪽의 내용에 크게 힘입어 작 성하였다. 152) 『편책』, 『독운사』 13, 434쪽. 153) 『편책』, 『독운사』 14, 98쪽. 154) 『편책』, 위의 책, 412-414쪽. 155) 『편책』, 위의 책, 42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