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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말의병 229 자로 지목되어 수배된 바 있으며, 그의 養父 박근욱은 右軍將으로 활동하다가 주도인물로 수배되었 다. 137) 한편 박민홍 의병부대의 재무장 朴汝洪은 박민홍의 동생으로 그 의병부대의 회계를 담당하다 가 1909년 2월 전투중에 중상을 입고 체포되어 일제 경찰의 訊問을 받았다. 138) 그런데 박민홍은 박민 수로 불리기도 하였으며, 참모장 권택과 함께 활동하였고, 박사화는 심남일 의병부대의 후군장이었다 가 독립하였다. 139) 그러면 이 시기 나주의병을 주도한 인물은 누구일까. 일제 경찰은 1908년에 김준 김율 형제를 대표 적 의병장으로 지목하였는데, 140) 이들 형제 의병장은 나주 출신이었다. 141) 따라서 이들이 전라도를 대 표하는 나주의 유생출신 의병장임을 알 수 있다. 142) 일제는 김준과 김율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수괴 김태원 (중략) 융희 원년 11월 동생 김율 및 기삼연 등과 호응하여 의병을 일으켜 그 세력이 한창일 때에는 부하 가 2백명이 넘었다. 나주 부근을 본거지로 하여 함평 장성 영광 담양 각군에 횡행(『폭도사』, 44 쪽). 거괴 김율 (중략) 한서를 읽고 다소 문필에 능하다. 스스로 박사라 칭하고 성품이 완미하고 항상 배일사상을 품고 한국의 대관이 일본에 아부하여 3천년의 고국을 판다고 개탄, 융희 원년 11월 거괴 기삼연 및 형 김태원 등과 호응하여 도당을 모아 그 세력이 한창일 때에는 부하가 2백명에 이르렀다(『폭도사』, 45쪽). 위에서 알 수 있듯이 이들 형제는 1907년 11월 기삼연의 호남창의회맹소에 가담했음을 알 수 있다. 흔히 김태원으로 알려진 김준의 본관은 慶州, 자는 泰元, 호는 竹峰이었다. 그의 집안은 오랫동안 벼 슬과는 무관한 한미한 집안이었는데, 아버지 대에 가세는 더욱 기울어졌던 것 같다. 그는 학문적 성취 보다도 세상사를 바로잡는데 관심이 깊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동학농민혁명기에 한때 농민군에 투신 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그 후에도 그는 나주 향리들의 해묵은 비리를 바로잡기 위해 관찰사에게 직 접 호소하여 해결함으로써 주민들의 칭송을 받은 적도 있었다. 이러한 일화는 그가 의협적인 인물로 성장했음을 알려준다. 137) 『密陽朴氏家乘』(1881), 7쪽 및 홍영기, 『대한제국기 호남의병 연구』, 136-137쪽 참조. 138) 『편책』, 『독운사』 13, 412-414쪽. 139) 『독운사』 1, 660·678-679 및 홍영기, 『대한제국기 호남의병 연구』, 301쪽. 140) 『暴徒史』, 8-9쪽. 141) 이들은 나주군 문평면 북동리 갈마지 출생으로 가난한 유생 집안이었다(홍영기 편, 『義重泰山』, 1쪽). 142) 김준과 김율에 관한 내용은 홍영기, 「김태원 · 김율 의병장의 생애와 의병활동」, 『의중태산』, 1-9쪽을 정리한 것 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