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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8 민주장정 100년, 광주·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하였다. 편제가 확정되면 이들은 다른 의병부대와 연합하여 서울을 점령할 계획이었다. 이들이 광주 담양 장성 등지를 무대로 항일투쟁을 전개하자 일제는 이른바 ‘남한폭도대토벌작전’을 실시하였다. 결국 그는 후일을 기약하며 甲鄕面에 잠적하였으나, 1909년 8월 하순 체포되고 말았다. 피체 후에도 양진여는 “자기 목숨은 아깝지 않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게 되어 유감”이라고 당당 하게 주장하였다. 134) 양진여는 대체로 수십명에서 100여명 정도의 규모를 유지하였는데, 의병의 전력 을 확대하는데 힘을 기울였다. 의병의 전투력이 증강되면 그는 전국 각지의 의병부대와 연합하여 서 울로 올라가 일시에 친일정권을 무너뜨리고 일본세력을 물리칠 계획을 구상했던 것이다. 양진여 의병 부대의 활동지역은 광주를 비롯하여 담양 창평 장성 등지로서 주로 전남의 중서부 내륙지방을 근거지 삼아 활동하였다. 그의 아들 양상기(1883-1910)는 일찍이 광주경찰서의 순사로 근무하였다. 그런데 그의 부친 양진 여가 의병을 일으킬 무렵 그도 경찰서를 그만 둔 후 의병부대를 조직하여 항일투쟁에 나섰다. 1908년 6월 그는 80여 명의 병력을 모아 광주 장성 담양 창평 등지를 무대로 활동하다가 일제의 압박에 못이 겨 1909년 6월 상순 부하를 해산하였다. 그도 부친과 마찬가지로 군자금의 확보 및 친일파 관리 및 일진회원 응징,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그러던 중 1909년 4월 담양의 덕곡 전투에서 크게 패하여 대부분의 병력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후 홀로 잠행하여 국외로 망명하려다가 1909년 12월 체포되고 말았다. 그는 신문과정에서 만약 풀려난 다 하더라도 다시 거의할 것임을 천명하였다. 그가 해외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지속해야 할 필요성 을 인식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7) 나주지역 후기의병의 주도인물과 활동 7-1) 주도인물 1907년 후반이후 나주지역에서는 비로소 의병 봉기가 모색된 것 같다. 그런데 이 시기에도 나주의 향리층이 의병을 주도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135) 나주의 대표적인 향리 가문이 이 시기 의병을 주도 하였다는 것이다. 즉 소수의 가문은 의병에 적극 가담하여 의병장으로 활동하였으나, 대다수의 가문 은 일제의 침략정책과 개화정책에 따른 사회질서의 변화에 편승하여 적극적으로 관직에 진출하거나 사회·경제적으로 활발한 활동을 전개했다는 것이다. 의병에 적극 가담한 가문은 密陽朴氏였는데, 의병을 일으킨 주요 인물은 朴民洪(1869-1909)과 朴 士化(1880-1910)로서, 이들은 8촌간이었다. 136) 박민홍의 부친 박화실은 1896년 나주의병의 주동 134) 『폭도사』, 133-134쪽. 135) 배항섭, 「중·후기 의병전쟁 시기 나주 지역 향리층의 동향」, 『한국사학보』 23(2006). 이 글에서는 을사조약 이후 중기의병에 해당하는 언급은 거의 없다. 대부분 1908-1909년 사이에 향리층이 일으킨 의병활동을 검토한 것이다. 136) 배항섭, 위의 논문, 20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