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8page

226 민주장정 100년, 광주·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곡 수탈에 앞장섰기 때문이다. 이들은 초보적인 유격전술을 구사하면서 한층 강화된 일본군의 탄압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였다. 또한 오성술은 필요할 때마다 전해산 심남일 안규홍 의병부대 등과 연합전선 을 형성하며 상당한 전과를 거두었다. 예를 들면 1908년 7월경 그는 전해산 의병부대와 합진하여 石門山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10월 16일 함평 大明洞 전투에서도 그의 의병부대는 전해산 의병부대와 합진하여 일본군 7명을 사살하고 다수의 무기류를 노획하는 전과를 올렸다. 1909년 1월 1일에도 이들이 합동작전을 전개하여 古幕院 헌병분파소를 공격했다. 연합 의병부대는 고막원 헌병분파소를 장악한 뒤 2명의 헌병 보조원을 사살 하고 다수의 무기류를 노획하는 전과를 거두었다. 그리고 3월 8일에는 나주군 남평면 거성동에서 심 남일 의병부대와 합동작전을 벌여 다수의 일본군을 살상하는 큰 전과를 거두었다. 호남의병의 활약으로 일제 군경이 진퇴양난에 빠지자, 그들은 대규모의 병력을 일시에 투입하여 호 남의병을 섬멸하기 위한 군사작전을 수립했다. 이른바 ‘남한폭도대토벌작전’(1909년 9-10월)이 그 것이다. 이 무렵 그는 일본군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그는 심남일 전해산 박영근 등과 함께 대구로 압 송되어 1910년 9월 대구감옥에서 교수형으로 순국하였다. 이와 같이 오성술 의병부대는 1907년 후 반부터 약 2년간 광주 나주 담양 함평 일대를 누비며 반일투쟁을 주도하였다. (4) 曺京煥 의병부대 조경환(1876-1908)은 光山 출신의 유생의병장이었다. 그의 호는 大川, 아명은 丁擧, 본명은 準煥 으로 최익현의 영향을 받아 의병에 투신하였다. 그는 1907년 음 12월에 김준의 휘하에 들어가 좌익 장으로 활동함으로써 함평읍, 창평 茂洞村, 장성 浪月山, 영광 月巖山 , 魚登山 전투 등 수많은 전투에 참여하였다. 1908년 4월 하순 의병장 김준이 전사하자, 그는 흩어진 의병을 수습하여 전해산과 함께 의병부대를 이끌었다. 1908년 음 7월에 이들은 일본군경의 추적을 분산시킴으로서 보다 효과적인 항 일투쟁을 전개하기 위해 의병부대를 나누었다. 조경환 의병부대의 주요 구성원으로는 도통장 朴鏞植, 선봉장 金元國, 도포장 金元範, 摠督將 朴圭 奉, 좌익장 金東洙, 謨士 權澤, 一哨什長 李東彦, 3초십장 元在龍, 4초십장 徐景洙, 童蒙執事 金福東 郭鎭一 趙贊成 등이다. 이들은 1백명 내외의 군세를 헝성하여 전라남도 광주 함평 영광 장성 담양 등 지를 무대로 활동하였다. 조경환 의병은 전해산 金汝會 심남일 의병부대와 연합작전을 펼치기도 하였 다. 1908년 음력 12월 하순, 過歲하기 위하여 일시적으로 대부분의 부하를 귀향시켰다. 나머지의 부 하들을 이끌고 그는 광주 어등산에 주둔하다가 일본군 헌병대의 급습을 받아 그를 비롯한 20여 명이 순국하였다. 그의 뒤를 이어 선봉장 김원국이 흩어진 의병을 수습하여 항일투쟁을 이어갔다. 조경환 의병은 한말 호남지역 후기의병의 활성화에 크게 기여하였으며, 후기의병의 연합항쟁을 선도한 점에 서 그 의미가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