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7page

한말의병 225 전혀 굽히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김율 역시 형의 시신을 확인시키려는 일제 군경에 의해 어등산에 끌려가다가 총살되고 말았다. 두 의병장이 순국함으로써 김준-김율 의병부대는 해산되었다. 일제는 「警示」라는 게시문을 각지에 붙여 김준·김율 의병장이 죽었다는 사실을 널리 알렸다. 그러나 주민들은 신출귀몰하던 이들이 결코 죽었으리라 생각하지 않았다. 형제의병장의 죽음을 선뜻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이다. 이는, 김준 김율 의병부대가 주민들의 적극적인 지지를 받으며 활동하였음을 의미한다. 결국, 김준과 김율 의병부대의 활동은 1908년 4월에 종식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제의 군경은 의병장을 잃은 의병의 진압을 계속하였다. 또한 일제는 여러 지역에 은닉된 군량미와 무기를 찾아내 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하지만, 두 의병장의 반일투쟁을 흠모한 조경환 전해산 심남일 오성술 등의 의 병장이 등장하여 호남지역의 의병항쟁을 계승하였다. 그리하여 1908년 후반부터 1909년 사이에 전 라도는 의병전쟁의 주무대가 되었던 것이다. 김준 김율 의병장의 뛰어난 지략과 전술이 이후의 의병 항쟁에 크게 영향을 끼쳤음을 알 수 있다. 김태원이 동생에게 준 글로써 당시 이들의 의기가 얼마나 숭고했는지 확인할 수 있다. 사랑하는 聿에게 주는 글 국가의 안위가 경각에 달렸거늘 의기남아가 어찌 앉아서 죽기를 기다리겠는가. 온힘을 쏟아 충성을 다하는 것이 의에 마땅한 일이니 백성을 건지려는 뜻일 뿐 명예를 위하는 것은 아니라네. (3) 吳成述 의병부대 오성술(1884-1910)은 광주 출신으로, 호는 竹坡, 휘는 仁洙이며, 成述(혹은 聖述)은 자이다. 그는 나주 출신의 김태원 등과 함께 호남창의회맹소에서 활동하였다. 호남창의회맹소의 대장 기삼연이 순 국한 이후 그는 김준 의병부대의 핵심참모로 활약했던 것이다. 하지만 얼마후 김준 역시 광주 어등산 전투에서 전사, 순국하였다. 이러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그는 흩어진 의병을 수습하여 전열을 가다듬었다. 마침 전북의 이석용 의병부대에서 활동하다가 김준 의병장을 흠모하여 찾아온 전해산과 만나 이들은 의기투합하였다. 전 해산 조경환 등과 함께 오성술은 자신이 학문에 정진했던 聳珍山에서 새로운 의병부대로 개편했다. 처음에는 조경환을 의병장에 추대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부대를 소규모로 나누어 각자 독립적인 의 병부대를 이끌었다. 그의 의병부대는 곡창지대인 남도 땅에 침투하여 경제침탈에 앞장선 일본인 소유의 농장을 주 공격 대상으로 삼았다. 당시 한국에 이주한 일본인들은 한국 농민의 토지를 빼앗아 농장을 설치하고서 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