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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말의병 223 게 출현하자, 의병들은 크게 동요하였다. 하지만 의병장 김준은, “그대들이 죽음을 두려워하는가. 대장부 남아가 죽을지언정 불의에 굴하여 서는 안된다. 또 적이 사방에서 총을 쏘는데 어찌 도망할 길이 있겠는가”하고서 대책을 수립하였다. 즉, 포수인 강길환과 조덕관 등 의병들을 돌담의 좌우에 매복시켰다가 일시에 총을 쏘게 한 것이다. 결국, 이들은 침착한 대응으로 일본군 수비대를 격파하였다. 담양 무동촌전투에서 이들은 일본군 수 비대 가와미즈(川滿) 조장과 사병 등 2명을 죽이고 2명에게 부상을 입혔다. 130) 한편, 1908년 1월말 기삼연이 이끄는 의병부대는 담양의 금성산성에 유진중, 일본군의 기습을 받아 크게 패하였다. 이 전투에서 기삼연은 다리에 부상을 입어 순창에 은신하였다가 붙잡히고 말았다. 의 병장 기삼연이 피체되었다는 소식을 접한 김준은 날랜 병사 30명을 이끌고 광주 경양역 부근까지 추 격했으나 허사였다. 이미 일본군이 기삼연을 광주로 이송한 뒤였던 것이다. 기삼연을 탈옥시키려는 움직임을 눈치챈 일본군은 기삼연을 정상적인 절차도 거치지 않은 채 광주천 백사장에서 총살시키고 말았다. 호남창의회맹소는 의병장을 잃었으나, 이미 분진하여 독자적인 활동을 해왔던 관계로 별다른 타격 을 받지 않았다. 김준과 김율이 이끄는 의병부대는 ‘湖南義所)’라는 이름으로 바꾸어 더욱 적극적인 반일투쟁을 전개하였다. 뿐만 아니라 이들은 친일파인 일진회원과 밀정, 자위단원 등을 닥치는 대로 처단하였으며, 군량미를 모금하여 곳곳에 숨겨놓기도 했다. 그리고 주민들에게는 일제에 세금을 내지 말라고 호소했다. 즉 납세거부투쟁을 유도한 것이다. 따라서 일본군은 대규모의 병력을 동원하여 이들을 진압하는데 온힘을 기울였다. 여기에 맞서 김준 과 김율은 각 군의 군수와 주사·자위단, 그리고 향교에 글을 수시로 보내어 의병활동의 정당성과 도 움을 호소했다. 일본군의 진압과 회유가 집요해진 시기에 맞불을 놓으며 의병에 가담할 것과 도움을 요청했던 것이다. 김준·김율 의병부대는 민중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다. 이들이 주민들의 지지를 받을 수 있었던 배 경에는 무엇보다도 주민들에 대한 토색을 금지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의병부대의 투쟁역량을 강 화하여 일본군경과의 전투에서 거의 승리를 거두었기 때문에 민중의 지지를 획득할 수 있었으리라 믿 어진다. 이 점과 관련하여 매천 黃玹은 의병장 김준에 대하여 “기발한 전략을 많이 이용하여 1년여 동안 수 백명의 일병을 죽였으며, 부하를 엄히 다스려 백성에게 민폐를 끼치지 않았다”고 높이 평가하였다. 일제조차 김준을 “신출귀몰하여 군대와 경찰의 두통거리”라거나, 1908년의 가장 대표적인 의병장으 로 김준·김율 형제를 꼽았다. 이는, 그가 청장년 중심의 정예의 의병부대로 조직하여 “敢死之卒”, 즉 죽음을 각오한 결사대로서 활동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이들이 장성의 토천전투에서 승리하였다. 130) 『폭도사』, 35-3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