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4page

222 민주장정 100년, 광주·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바랄 수도 없는 것으니 기왕 죽기는 마찬가지일 바에야 싸우다가 죽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하였다(오 준선, 「의사 김준 전해산 합전」, 『後石遺稿』). 동요하는 의병들의 마음을 되돌려 놓은 후 자신이 직접 앞장서서 돌담에 의지하여 침착하게 총을 쏘 아댔다. 기습당한 의병이 쉽게 무너질 것이라 안이하게 생각한 일본군경이 오히려 당황할 수밖에 없 었다. 결국 김준의 재빠른 판단에 의해 문수사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김준의 군사적 지식과 대담성 등을 높이 산 기삼연은 김준을 호남창의회맹소의 선봉장에 임명하고 서 군무를 맡겼다. 이후 고창읍성을 점령할 때에도 김준은 선두에 서서 의병을 지휘하였다. 하지만 곧 바로 일본군경의 역습을 받아 고창성을 내주고 말았다. 이 과정에서 참모 김익중 등 적지 않은 의병들 이 희생되었다. 장성 白羊寺 방면으로 물러난 기삼연과 김준 등은 흩어진 군사를 수습하고 전열을 가다듬으며 새로 운 전략의 수립에 고심하였다. 이들은 여러 지역에서 일시에 의병이 일어나기를 기대하였으나, 우선 그렇지 못하다는 점을 안타깝게 생각했다. 또한 훈련이 되지 않은 의병을 대부대로 운용하는 것도 무 모하다고 판단하였다. 아무래도 기동성이 저하되었기 때문이다. 결국 기삼연과 김준은 의병부대를 서 로 나누어 분산, 활동하기로 결정하였다. 기삼연과 김준은 군사를 나누어 활동하면서 의병의 규모를 차츰 늘려갔다. 이처럼 군비를 갖추어가던 호남창의회맹소는 영광을 공격하려다 여의치 않자, 법성 포의 일본인을 공격하였다. 법성포에는 조기어장과 세곡의 운송로를 안정적으로 확보하기 위해 상당 수의 일본인들이 일찍부터 들어와 있었다. 이들을 위한 주재소와 우편취급소, 상점 등이 갖추어져 있 었음은 물론이다. 의병들은 이러한 시설물을 모조리 불태웠으며, 창고에 쌓여있는 곡식을 주민들에게 나누어주었다. 그후 독자적인 의병부대로 활동하게 되자, 김준은 선봉장에 曺京煥, 도포장에 崔東鶴, 후군장에 金 玉鉉, 참모장에 劉秉淇 등을 임명했다. 그리고 동생 율로 하여금 따로 의병부대를 이끌게 하였는데, 김율 의진의 경우 선봉장은 文祥麟과 후군장 尹東淳 등이었다. 당시 김율은 의병에 투신할 것을 권유 받자, “대장부가 이런 세상을 당하여 거의하지 않는다면 어찌 국가에 보답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며 형의 제안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투쟁역량을 강화한 김준 김율 의병부대는 영광 함평 나주 등 주로 전남 서부지역의 전투에서 승리 를 거둠으로써 전라도 일대에 이들의 명성은 크게 높아졌다. 패배한 경우도 없지 않았으나, 이들이 당 시의 항일투쟁을 주도하였음은 물론이다. 따라서 일본군 광주수비대는 이들의 활동을 저지하기 위해 1908년 1월 24일부터 작전에 들어갔다. 15개 부대로 편성된 일본군 수비대가 의병활동이 크게 성한 지역을 중심으로 진압작전을 펼쳤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담양의 茂洞村에 광주수비대가 나타났다. 당시 김준 의병부대는 추위를 피하고 설날을 지내기 위해 담양 남면의 무동촌에 유진중이었다. 전혀 예상치 않았던 일본군 광주수비대가 갑작스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