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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말의병 221 호남의병의 확산에도 크게 기여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2) 김준-김율 의병부대 그러면 같은 시기에 장성의 인근인 광주와 나주의 동향은 어떠했을까 궁금하다. 당시 의병들은 대체 로 광주의 외곽과 나주를 중심으로 매우 활발한 항일투쟁을 전개했던 것 같다. 그러한 상황을 짚어 보 기로 하자. 일본측은 1906-7년 사이에 전라남도에서 활약한 대표적인 의병장으로 최익현 고광순 기삼연을, 1908년에는 金準 金聿 형제를, 1908년 후반부터 1909년까지는 全海山 沈南一 安圭洪 등을 꼽았 다. 128) 이 가운데 김준과 김율 의병부대는 호남창의회맹소의 분진과 그 이후의 호남의병 활성화에 크 게 기여하였다. 더욱이 김준과 김율은 친형제로서 의병에 투신하여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129) 흔히 金泰元으로 불린 김준(1870-1908)과 동생 김율(1881-1908)은 한학에 조예가 깊었으나 뚜렷 한 사승관계는 잘 알 수 없다. 아마도 노사학파의 일원이 아니었을까 한다. 이들이 호남창의회맹소에 적극 가담한 사실로 보아 그러하다. 일제의 침탈이 갈수록 심화되자 이들 역시 의병을 도모할 생각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이들은 흉금을 터놓던 金燉 등 동지들과 상의하였는데, 김돈은 독자적으로 의병 을 일으키는 것 보다는 기삼연 의병부대와 연합하라고 종용하였다. 당시 김돈은 다음과 같이 말하며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다. 세력이 고립되면 적을 부수기 어렵고, 힘이 합하여지면 큰 일을 성취할 수 있다. 들은즉 성재가 충성 되고 신의가 있어 믿을 만하다 한다. 옛사람이 이르기를 ‘우리가 名族에 의탁하면 진나라를 반드시 부수리라’하였는데, 기공은 곧 노사선생의 조카이니 지금의 명족이 아닌가 하며 기삼연의 의진에 합 류할 것을 적극 권하였다(오준선, 「의사 김준 전해산 합전」, 『後石遺稿』). 김돈의 주장을 받아들인 김준은 기삼연의 호남창의회맹소에 가담하기로 결심하고서 동지들과 함께 장성으로 갔다. 동생 율은 나중에 합류하기로 하고 자신이 먼저 출발한 것이다. 이때가 1907년 음 9 월경이었다. 김준은 고창의 호남창의회맹소의 본진이 주둔하고 있던 文殊寺에 도착하여 기삼연과 앞으로의 항일 투쟁의 방략에 대해 논의하였다. 그런데 그날 밤 일본군경에게 기습을 당하고 말았다. 의병들은 크게 당황하여 어찌할 줄을 몰랐다. 김준이 앞으로 나서며 큰소리로 아래와 같이 외쳤다. 의병이라 이름하였는데, 적을 만나 도망하는 것은 계책이 아니다. 더욱이 험한 산길에서 살아나기를 128) 『폭도사』, 8-9쪽. 129) 홍영기 편, 『義重泰山--한말의병장 죽봉 김태원 청봉 김율 자료집--』, 1998. 이 글의 주요 내용을 주로 정리했음 을 밝혀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