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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 민주장정 100년, 광주·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들이 비교적 쉽게 의병활동을 재개할 수 있었던 배경은 호남창의회맹소가 합진과 분진이 용이한 조직 체였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이들은 호남창의회맹소를 결성할 때부터 여러 개의 의병부대의 통합 체로 출범했던 것이다. 그런 까닭에 이들중 일부 부대는 일제의 진압작전 기간에도 거의 피해를 입지 않아 쉽게 재편할 수 있었던 것이다. 호남창의회맹소 계열의 활동이 전라도 전역으로 확대되자 일제는 군사작전과 회유공작을 병행하였 다. 1907년 후반에는 자위단을 편성하여 의병에 대한 정찰과 경계 활동을 강화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일진회가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리고 의병을 대상으로 귀순공작을 병행 함으로써 의진 내부의 분열을 부추겼다. 때로는 특정 의병부대를 와해할 목적으로 특설순사대나 전담 토벌대를 편성하여 수시로 진압작전을 전개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수많은 호남의병들이 희생되었 음은 물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라도 의병들은 주민들의 지지를 바탕으로 1908-9년 사이에 의 병항쟁의 주역으로 활동하였다. 이는, 호남창의회맹소의 적절한 투쟁방략에 의해 의병투쟁이 장기화 하게 되어 전라도는 1908-1909년에 후기의병의 중심무대가 되었던 것이다. 이상과 같이 기삼연의 주도로 결성된 호남창의회맹소를 살펴보았다. 호남창의회맹소는 2단계에 걸 쳐 결성되었다. 먼저 기삼연은 1907년 음력 9월 초에 장성 隨緣山 石水菴에서 독자적으로 의병을 일 으킨 다음, 1907년 10월 30일(음 9.24) 기삼연 의병부대를 비롯한 약 4-5개의 의병부대가 장성 수연 산 석수암에 모여 호남창의회맹소를 결성하였다. 호남창의회맹소의 지도부 중에는 상당수의 인물들이 노사학파 계열로서, 衛正斥邪思想과 春秋의 義 理를 중시하였다. 이들은 주로 長城 · 靈光 · 高敞·羅州 등지에 거주하였다. 이들이 의병을 일으 킨 목적은 고유의 人心과 전통적인 제도를 파괴하는 일제의 침략을 저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물론 대 한제국의 주권과 천연 자원, 그리고 국민들의 생존권을 보호할 목적임을 분명히 하였다. 이 과정에서 김용구 기삼연 등이 조직한 一心契가 의병봉기의 선행조직체로서 기여한 바가 적지 않았다. 호남창의회맹소는 대외선린관계의 중시, 타 지역 의진과의 연대 강화 그리고 현상금 제도의 도입 등 다른 의병부대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활동방향을 제시하였다. 한편, 이들은 大韓每日申報에 자신들의 의병봉기 사실을 게재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는, 계몽운동계열과 의병계열이 합류할 수 있는 시사 점을 제공했다는 점에서 주목되었다. 이들은 강력한 반일투쟁의 전개와 함께 防穀과 수입품의 매매금 지, 납세거부투쟁 및 徵稅 금지, 自衛團과 一進會員의 처단 등과 같은 활동을 벌였다. 이들의 활동이 크게 확산되자, 일제는 1908년 초를 전후하여 대규모의 병력을 투입하여 의병진압작 전을 펼쳤다. 이 과정에서 의병장 기삼연이 담양 金城山城에서 기습을 당해 체포, 처형되는 등 약 200 여 명이 희생되었다. 이로써 기삼연 중심의 호남창의회맹소의 활동은 일단락되었다. 그러나 호남창의 회맹소의 지도부들이 이끄는 分陣한 의병부대에 의해 의병활동은 전라도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그리 하여 호남창의회맹소의 활동과 분화에 힘입어 전라도 지방은 1908-9년 사이에 가장 격렬한 의병의 활동 무대가 되었다. 요컨대, 장성지역의 노사학파가 호남지역 최초로 의병을 일으켰을 뿐만 아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