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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말의병 219 살하고 3월 7일 토벌대의 편성을 풀어 각 수비지로 귀환하였다(『토벌지』, 『자료집』 3, 741쪽). 남부수비관구 사령관이 예하 연대를 직접 파견하여 전라·경상도 의병의 진압을 독려하였다는 것이 다. 일제의 진압작전은 2월 7일부터 약 한달동안 계속되었다. 당시 그들은 15개 전담부대를 편성하여 전라도 서부지역에서 활동하는 호남창의회맹소 계열의 의병부대와 지리산 지역에서 활동중인 金東臣 의병부대를 진압의 주된 대상으로 삼았다. 122) 14연대 병력 외에도 일제는 조치원 기병대의 일부를 전 라도에 파견하여 2월 13일부터 약 보름동안 군사작전을 펼쳤다. 123) 기병대는 5개의 分進隊로 편성되 어 의병의 근거지였던 사찰이나 촌락을 목표로 정밀 수색을 실시하였다. 이 과정에서 호남창의회맹소 계열의 여러 의병부대가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당시 호남창의회맹소 는 몇 개의 부대로 나뉘어 활동중이었다. 기삼연이 이끄는 본진은 겨울 추위를 피하고 설을 지내기 위 하여 일시 활동을 중단할 계획이었다. 그리하여 의병장 기삼연은 본진을 이끌고 담양읍에 소재한 우 편소·세무서·군아 등을 점령하여 각종 기물을 파괴한 후에 金城山城에 주둔하였다. 124) 이들은 담양주재소의 순사대와 순창 및 광주의 수비대로 구성된 합동토벌대에 의해 기습을 당했 다. 125) 금성산성 전투에서 약 30명의 의병이 전사했으며, 부상당한 의병도 30여 명이나 되었다. 결국 기삼연은 정월 보름 이후에 다시 모이기로 약속한 뒤 자신은 순창의 구수동에 몸을 숨겼다. 1908년 2월 2일 음력 설날 기삼연은 순창 복흥의 구수동에서 이마무라(今村) 토벌대에 의해 체포되고 말았 다. 126) 이 소식을 전해들은 선봉장 김태원은 날랜 병사 30여 명을 이끌고 광주 근교의 景陽驛까지 추 격하여 기삼연의 탈환을 시도하였다. 기삼연을 탈환하려는 의병들의 시도에 불안해하던 일제의 헌병 대는 그를 곧바로 총살해버렸다. 127) 이로써 기삼연 중심의 호남창의회맹소의 활동은 종식되었다. 한편, 의병장 기삼연의 휘하에서 활동하던 김용구를 비롯한 호남창의회맹소의 지도부는 거의 붕괴 상태의 본진을 신속하게 재편하였다. 이들이 재기하는 과정을 일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본년 2월 초순부터 3월에 걸쳐 기쿠치(菊池) 토벌대가 광주 부근을 소탕하여 수괴 김용구(기삼연 : 저 자주) 이하 2백여 명을 사살하였으므로 일시 정온 상태를 유지하였으나, 賊焰은 곧 재연하여 전라 양 도 일대에 걸쳐 소요를 야기하게 되었다(『토벌지』, 『자료집』 3, 771쪽). 호남창의회맹소의 지도부가 곧바로 부대를 재편하여 다시 반일투쟁에 나섰다는 것이다. 이처럼 이 122) 『편집자료』, 『자료집』 3, 560쪽 및 『편책』, 『독운사』 9, 33-34·238쪽. 123) 『토벌지』, 『자료집』 3, 741쪽 및 『편책』, 『독운사』 9, 198-199쪽 참조. 124) 「報告」 제11호(1908.3.23), 『內閣各道來報』 제1책(內閣 편, 규장각 소장, 규 17982의 4) 참조. 125) 『폭도사』, 35쪽 및 『편집자료』, 『자료집』 3, 555 562쪽 참조. 126) 『編冊』, 「首魁 奇參衍逮捕狀況件」(국가기록원 소장, 문서번호 경무 88-23, 1908), 0464-0474쪽. 127) 광주헌병대의 기삼연 총살사건은 당시에 사회적 문제가 되었던 것 같다. 광주관찰사 신응희가 헌병대에 조회하여 기 삼연을 불법적으로 총살한 자를 처벌하라고 요구하였다는 점에서 그러하다(「성재공행록」, 『호남의병장열전』 ; 『자 료집』 2, 67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