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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민주장정 100년, 광주·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자료를 찾을 수 없는 형편이다. 단, 적어도 1893년 이전에 이미 이 지역에는 믿음이 깊은 동학교인이 많았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1893년 4월 보은취회에 전남의 동학교인이 적극적으로 가담한 점에서 그러하다. 따라서 전남지역은 1880년대 말에서 1890년대 초에 동학교인이 집중적으로 증가하였으리라 짐작된다. 그 대표적 사례를 들자면, 전남 동부지역의 경우에도 1890년을 전후하여 동학교인이 크게 증가하지 않았나 한다. 예컨대, 전남 고흥출신의 宋年燮과 광양출신의 趙斗桓은 1890년에 각자의 고향에서 입도하였다. 이들은 모두 20대의 나이로 동학에 입교하였으며, 보은취회와 동학농민혁명에 적극 가담하여 활동하였다. 그후 이들은 천신만고 끝에 살아남아 해당 지역의 유력한 천도교 지도자로 성장, 활동하였다. 7) 이처럼 이 지역의 유력한 동학지도자들은 대체로 1890년을 전후한 시기에 입도한 것으로 보여진다. 이 무렵, 동학에 입교한 사람들의 사회적 특징은 무엇일까. 이러한 궁금증을 푸는 데는 당시 報恩聚會 당시 兩湖宣撫使로 파견되었던 魚允中이 남긴 기록이 주목된다. 8) 그는 동학이 창시되던 초기에는 주술적 행위와 참언을 믿는 자들이 입교하였으나, 나중에는 재주와 기개는 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한 자, 백성을 위해 목숨을 걸고서 탐학을 제거하려는 자, 외세의 이권침탈을 반대한 자, 京鄕 토호의 가렴주구에 시달리는 자, 극빈 농민과 몰락 상인, 常賤 신분에서 벗어나려는 자 등이 들어갔다고 파악하였다. 다시 말해, 시간이 지날수록 부패한 정치를 혐오하거나, 탐관오리의 수탈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거나, 외국의 이권침탈을 반대하거나, 신분 해방을 희구하는 세력들이 동학에 입교하였다는 것이다. 요컨대, 반정부적인 사람들이 동학에 들었음을 알 수 있다. 2) 교조신원운동과 전라도 동학교인의 동향 한편, 최제우와 최시형을 중심으로 한 동학 지도부는 전라도를 비롯한 전국 각지에서 온갖 고난을 이겨내며 교세를 계속 확장하였다. 이들은 교단조직을 정비하여 급속하게 증가한 동학교도를 보다 효율적으로 관할하였다. 즉, 일종의 교구인 包를 설치하고 그 신자의 많고 적음에 따라 都接主·大接主·首接主·接主 등을 두고서 동학교인들을 지도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각 포에는 六任制를 시행하여 교장(敎長)은 바탕이 진실하고 신망이 두터운 사람, 敎授는 다른 사람에게 교리를 전하고 가르칠만한 사람, 도집(都執)은 기강을 밝히고 경계를 아는 사람, 집강(執綱)은 시비를 가릴 줄 아는 사람, 大正은 근후한 사람, 中正은 강직한 사람 중에서 임명하여 교구를 운영하도록 하였다. 9) 그 결과 당시 농민들은 동학이라는 새로운 종교에 의해 조직화되어 점차 거대한 사회세력으로 부상되었다. 이들은 강력한 조직을 바탕으로 敎祖의 伸寃을 요구하였는데, 1892년 봄부터 접주 7) 이상은 김재계, 「故琴庵宋年燮氏를 追悼함」(『天道敎會月報』 252, 1931. 12)과 허남호, 「故蕭庵趙斗桓氏를 追悼함」(같은 책 279, 1935. 9) 참조. 8) 『東學亂記錄』 상(국사편찬위원회, 1959), 122쪽. 9) 박맹수, 『崔時亨 연구 ―주요활동과 사상을 中心으로』(한국정신문화연구원 박사학위논문, 1996), 10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