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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4 민주장정 100년, 광주·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그는 1909년 5월 부대의 지휘권을 호군장 박영근에게 이양하고 전북 장수군의 산골에서 학동들을 가르치며 후일을 대비하고 있었다. 그는 1909년 12월 어느 변절자의 밀고로 영산포헌병대에 체포되 었다. 당시 대한매일신보의 「전대장의 기상」에서는 그를,“공평정직하고 일호도 사사 뜻이 없는 진실 한 의사”라고 평하였다. 그는 최후진술에서 일본인 재판장을 향해“내가 죽은 후에 나의 눈을 빼어 東 海에 걸어 두라. 너희 나라가 망하는 것을 내 눈으로 똑똑히 보리라”고 말하였다. 1910년 8월 그는 사 형을 선고받고 여러 동지들과 함께 대구감옥에서 순국하였다. 한편, 함평 출신의 대표적인 의병장은 沈南一(1871-1910)을 들 수 있는데, 그는 출신지보다는 나주 영암 장흥 등 중남부 지역에서 주로 활동하였다. 그는 동향 출신의 牟千年·李江山·朴永根 등과 함 께 활동했는데, 이 글에서는 남부지역 의병항쟁에서 서술할 것이다. 2. 전남 중부지역의 의병항쟁 전라도에서 처음으로 의병을 일으킨 장성은 지속적으로 의병봉기를 시도한 바 있었다. 후기의병 시 기에도 장성에서 가장 먼저 의진을 결성함으로써 후기의병의 확산에 크게 기여하였다. 그 대표적인 의진이 바로 湖南倡義會盟所이다. 따라서 여기서는 호남창의회맹소의 결성과 활동을 살펴보는 것으 로 시작하려 한다. (1) 호남창의회맹소 1-1) 호남창의회맹소의 결성 호남창의회맹소는 호남지역 후기의병을 선도하고 확산시킨 대표적인 의진이다. 따라서 湖南倡義會 盟所는 일찍부터 관심의 대상이 되어 왔다. 94) 지금까지의 연구를 통하여 호남창의회맹소의 의병장인 奇參衍의 家系와 思想, 그의 의병활동, 그리고 호남창의회맹소의 활동이 구체적으로 밝혀졌다. 여기 서는 그러한 연구성과를 중심으로 정리하였다. 95) 1906년 6월에 일어났던 태인의병의 여파는 전라도 각지에 널리 퍼졌다. 특히, 유림세력이 강했던 94) 호남창의회맹소에 대한 연구성과는 다음과 같다. 金 湞, 「韓末 全南 長城의 義兵抗爭」, 『光州敎育大學 論文集』 21(1981). ----, 「韓末 全南의 丁未義兵」, 위의 책 24(1983). 李相寔, 「韓末의 民族運動--長城地方의 義兵活動 을 中心으로--」, 『人文科學』 2(木浦大, 1985). 강길원, 「後隱 金容球의 抗日鬪爭」, 『人文論叢』 16(全北大, 1986). 奇浩元 編, 『省齋奇參衍先生傳』(韓國文化社, 1990). 洪淳權, 「한말 호남지역 의병 투쟁의 한 양상--奇參衍의 長城 蜂起와 <湖南倡義會盟所>를 중심으로--」, 『全南文化財』 3(1990). 姜吉遠, 「省齋 奇參衍의 抗日鬪爭」, 『水邨朴永 錫敎授華甲紀念 韓民族獨立運動史論叢』(탐구당, 1992). 홍영기, 『대한제국기 호남의병 연구』 제2부 제1절 호남창 의회맹소(일조각, 2004).· 한편, 의진의 명칭이 명확한 경우에는 의진명을 중심으로 서술하고, 그렇지 않은 경우에 는 의병장 이름을 두서하여 의진의 조직과 활동을 서술하고자 한다. 95) 이 부분은 홍영기, 『한말 후기의병』(독립기념관, 2009)의 해당 부분을 수정한 것임을 밝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