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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2 민주장정 100년, 광주·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흩어진 의병들을 수습, 재편하였다. 그후 음력 8월에 조경환 의병부대와 분진하여 스스로 독자적인 의진을 이끌고 본격적인 의병항쟁에 나섰다. 그는 거병 동기와 의병활동의 정당성을 다음과 같이 천명하였다. 왜노는 우리나라 신민의 불구대천지원수이다. 임진의 화 또한 그러하거니와 을미 弑國母는 물론이고 우리의 종사를 망치고 인류를 장차 다 죽일 것이니 누가 앉아서 그들 칼날에 죽겠는가. 만일 하늘이 이 나라를 도우고 조종이 眷顧하여 이 적을 掃淸하는 날에는 우리들은 마땅히 中興第一功臣이 될 것 이다. 일체 暴掠을 하지 말고 힘써 나라 회복을 위해 싸우다가 죽자(『독립운동사』 1, 594쪽). 전해산은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일제의 침략을 저지하자고 호소하였다. 동시에 그는 의 병부대의 명칭을 大東倡義團이라 짓고서 다음과 같이 의진의 편제를 갖추었다. 의병장 전기홍 선봉장 정원집 중군장 김원범 후군장 윤동수 호군장 박영근 도포장 리범진 척후장 임장택 도통장 김성채 참모장 임봉래 참 모 이영준 김돈 김공삼 김원국 이성화(『해산창의록』, 2쪽). 대동창의단은 김태원 의병부대의 잔여의병들이 많았는데, 전투력이 뛰어난 정원집과 같은 해산군인 이나 포수들도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90) 이들은 구한국 군대의 전통적인 편제를 갖추었다. 또한 일원 적인 지휘계통으로 구성되었는데, 일반 병사를 지휘하는 什長, 십장 위에는 都什長 - 都砲 - 先鋒 - 의병장으로 이어지는 지휘체계를 구비한 것이다. 91) 그리하여 대동창의단은 1908년 후반부터 의병활 동을 전개하여 다음해 4월 부대를 해산할 때까지 일제 군경과 혈전을 벌였다. 전해산 의병부대는 약 300명의 규모로 전남 서부의 곡창지대인 함평 나주 무안 영광 장성 광주 고창 부안 등지를 주 무대로 활동하였다. 전해산은 전라도의 다른 의병부대와 연합전선의 구축에 노력하였다. 특히 심남일, 조경환 김영엽 등 이 이끄는 의병부대와 자주 연합작전을 펼쳤다. 92) 전해산은 신속한 이동과 의병활동의 기동성을 살리 기 위해 간부들로 하여금 각기 수십명의 의병을 통솔케 하였으며, 자신도 100명 전후의 부하들을 지 휘하였다. 이처럼 이들은 소규모 부대로 나누어 활동을 하다가 필요할 경우에는 연합하여 합동작전을 90) 윤병석, 앞의 책, 262쪽. 91) 강길원, 앞의 논문, 29-30쪽. 92) 윤병석, 앞의 책, 262-26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