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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말의병 211 났지만 공부에 소질을 보이자, 그의 부친은 오직 학문 연마에 기대를 걸었다. 약 15년 동안 학문에 심 취하였는데 인근에 수재로 소문날 정도였다. 그가 특히 탐독했던 책은 의리와 명분을 양대 지주로 하 는 『春秋左氏傳』이었다. 또한 그가 점복(卜筮)에 능하여 신통한 예견력을 지녔다는 기록으로 보아 주 역에도 밝았던 것 같다. 85) 전해산은 큰 뜻을 키우고 학문을 도야하기 위해 담론을 즐겼다. 그는 유명한 학자를 찾아다녔는데, 당시 명망이 높았던 연재 송병선과 면암 최익현을 임피의 낙영당에서 만나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는 이 강회에서 받은 느낌을 다음과 같은 시로 표현하고 있다. 樂英이라 이름하니 의리는 가볍지 않고 산을 우러러 따랐으니 원근의 정을 알겠구나 사해에 풍진이 일어 정결한 곳이 없으니 무슨 말로 諸生에 답할 수 있으리오(송상도, 앞의 책, 138쪽). 당시 한국의 암울한 상황과 의리의 중요성을 암시하고 있다. 1906년 6월 최익현과 임병찬이 전북 태인의 무성서원에서 강회를 열고 의병을 일으키자 그 역시 가 담하기 위해 찾아갔다. 하지만 무장투쟁에 미흡한 유생군들이 대다수여서 이내 귀향하고 말았다. 86) 하지만 그는 노구의 몸으로 의병을 일으킨 최익현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는 임실을 중심으로 무기와 병력을 모아 진안 마이산에서 의병을 일으킨 李錫庸의 倡義同盟團에 참모로 가담하였다. 87) 그는 1907년 겨울에 일찍부터 친분이 두터웠던 이석용과 협의를 거쳐 핵심인물 로 활동하게 된 것이다. 88) 창의동맹단은 진안과 임실을 중심으로 전주 장수 남원 순창 정읍 등 전라북 도 서부 산간지역에서 활동하였다. 이들은 일제의 군경과 맞서 여러 차례 전투를 벌이며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하지만 이들은 1908년 3월 남원 사천전투에서 크게 패한 뒤 새로운 돌파구를 모색하지 않으면 안되 었다. 이석용은 전해산더러 남쪽으로 내려가 김태원 의병부대에 합하기를 권하였다. 이석용은 전북에 서, 전해산은 김태원과 같이 전남에서 각각 의병항쟁을 확산시켜 장차 남과 북이 연합하여 일제를 몰 아내려는 계획이었다. 89) 그러나 전해산이 전남으로 내려오기 전에 이미 김태원은 어등산에서 전사한 뒤였다. 그는 광주와 나 주 등지에서 활동 중인 오성술 조경환을 만나 재기의 방책을 논의하였다. 그리하여 조경환 등과 함께 85) 송상도, 『기려수필』, 138쪽 ; 윤병석, 『한말 의병장 열전』, 257쪽. 86) 윤병석, 앞의 책, 258쪽. 87) 『전북의병사』 하, 266쪽. 88) 송상도, 앞의 책, 138쪽. 89) 윤병석, 앞의 책, 26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