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page

208 민주장정 100년, 광주·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고 강변한 듯하다. 68) 하지만 사건의 전말은 위의 인용문이 비교적 정확하게 전해준다. 결국 정대홍· 정대인 형제는 이 사건과 관련하여 1909년 7월경 의병장 朴砲大에 의해 응징, 처단되었다. 69) 이처럼 의병간의 갈등이나 내분은 민폐의 자행에서 비롯된 경우가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 러한 사건은 의병의 戰力을 약화시킬 뿐만 아니라 의병부대간의 연합이나 협력관계의 장애요인으로 작용하였다. 더욱이 이는 적전분열이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이제 영광지역 의병활동의 변화에 따른 일제의 대응에 대하여 알아보기로 하자. 1907년 후반부터 영광에 의병의 기운이 고조되자, 일제는 1908년 1월에 長谷川中尉가 지휘하는 수비대 1개 소대를 배 치하였다. 이들에게는 영광을 중심으로 한 전주·무장·고창 등지에서 활동하는 의병의 정찰과 진압 임무가 주어졌다. 70) 그러나 수비대만으로는 의병을 막기에 역부족이었다. 영광읍만 하더라도 이미 세 차례나 의병의 공격을 받았으며, 인근 군읍도 대부분 상황이 비슷하여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의병들이 활동하는 중이었다. 71) 이와 같이 의병의 활동이 격렬해지자, 일제는 1908년 1월 25-6일경 영광 함평 장성 나주 등을 중심 으로 활동하는 의병의 진압에 돌입하였다. 72) 이 과정에서 김율의병부대의 가맹명부가 일제측에 의해 피탈됨으로서 의병 167명의 신원이 노출되었다. 또한 의병들은 일제의 진압을 피하기 위하여 일시적 이긴 하지만 대부분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기도 하였다. 73) 이 기간, 즉 1908년 2-3월 사이에 의병측은 일제의 강력한 군사작전으로 말미암아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예를 들면 호남창의회맹소를 이끌었던 의병장 기삼연이 부상중 체포되어 피살되었으며, 총 156명이 전사하고 16명이 피체되었던 것이다. 74) 더 나아가 일제는 이번 군사작전의 결과를 자세히 분석하고 있다. 그 가운데 주목되는 내용으로 아 래의 사항이 열거되어 있다. 각 지역에서 활동하는 대표적인 의병장과 그 규모, 진압과정에서의 유의 사항으로 일본군경을 기만하기 위한 귀순증의 소지와 기독교 서적의 휴대, 촌락에서의 숙박시 주민으 로 위장하는 경향 등을 들면서 각별한 주의가 요망된다는 것이다. 75) 그리하여 일제의 철저한 진압으 로 말미암아 영광 등지의 의병활동이 일시적으로나마 불가능할 정도였다. 이 지역에서 활동하던 의병 들이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였거나, 아예 도서지방으로 잠적하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병들은 곧 세력을 만회하여 반일투쟁을 전개하였다. 당시 가장 활발하게 의병 투쟁을 전개한 의병장으로는 나주출신의 김준·김율 형제의병장이라 할 수 있다. 특히 김준은 함평 영광 나주를 중심으로 맹렬하게 반일투쟁을 전개하자, 일제는 그가 이끄는 의병부대를 진압하기 위하 68) 『편책』, 『독운사』 14, 438쪽. 69) 『편책』, 위의 책 15, 130-131 135쪽. 70) 『편책』, 위의 책 8, 524쪽. 71) 『폭도사』, 33쪽. 72) 위의 책, 34쪽. 73) 당시 영광 등지에서 활동하던 의병들이 일제의 군사작전을 피해 대부분 무등산 주변으로 집결하였다. 일제는 그 규모 를 약 450명으로 파악하였다(『편책』, 『독운사』 9, 200쪽). 74) 「토벌지」, 『자료집』 3, 771쪽과 『편책』, 『독운사』 10, 74쪽 참조. 75) 『편책』, 『독운사』 10, 74-7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