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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말의병 207 잠자리를 제공하였다. 불갑사의 주지 幻海(環海)와 해불암의 주지 錦華는 이들에게 숙소와 음식을 제 공하는 등 적극 후원해주었다. 62) 요컨대, 의병들은 특정의 근거지를 구축하였다기 보다는 일본군경의 추적과 기습을 피하기 위해 불특정의 장소를 종횡무진으로 돌면서 활동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 의병들은 흔히 저녁식사 후에 행동을 개시하였지만, 전투력에 자신이 있을 경우에는 대낮에도 활동하였다. 63) 하지만 주로 야간에 활동하였기 때문에 고통스러운 점도 없지 않았던 듯하다. 그리고 의병활동이 장기화하면서 가정에 피치 못할 사정이 생긴 경우에는 특별히 허가를 얻어 다녀오기도 하 였다. 64) 혹한기인 음력 설을 전후해서는 부대 전체가 일시적으로 해산하여 고향에 돌아가 가족을 만 나 회포를 풀기도 하였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보건대, 의병항쟁이 일시적이거나 임시적이라기 보 다는 장기화되어가는 양상을 확인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의병부대간에 갈등이나 내분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전략전술의 차이나 민간인 침탈행 위 혹은 지휘권의 갈등 등으로 인하여 피아간에 희생자가 발생한 적도 있었다. 영광의 의병들 사이에 서도 그러한 일이 발생하곤 하였다. 이를테면, 영광군 陳良面 斗湖村에서 의병들끼리 서로 세력다툼 을 벌이기도 하였으며, 65) 의병장 김용구는 우연히 마주친 의병장 柳宗汝의 부하 2명을 살해하기도 하 였다. 66) 그 이유는 명확하지 않으나, 대체로 무고한 민간인을 침탈한 사건을 응징하는 과정에서 빚어 졌던 것 같다. 67) 영광에서 활동하던 의병부대의 내분 중에 가장 큰 사건은 鄭大洪에 의한 李大克殺害事件이라 할 수 있다. 아래의 인용문에 주목해보자. 賊魁 李大局(李大克 : 필자주)은 그 部將인 鄭大洪이 火賊的 行爲가 있어 良民을 괴롭힘을 미워하여 銃器 12정을 收去하였던 바 鄭은 이를 분히 여겨 우연히 同月(5월 : 필자주) 21일 李가 부하 약 30명 을 인솔하고 五龍里에 휴식하여 夕食을 하고 있었던 차에 鄭은 부하 약 70명을 인솔하고 와서 이를 포위 (중략) 鄭은 李를 포박하여 禮洞山中에서 李를 銃殺하였다 한다(『편책』, 『독운사』 14, 392쪽). 이 사건 역시 의병을 빙자하여 정대홍이 민폐를 끼치자, 이대극이 그것을 질책하는 과정에서 초래된 것이다. 그러나 정대홍은, 이대극이 의병을 해산하고 귀순하려 하였기 때문에 부득이 살해한 것이라 62) 「전해산진중일기」, 『자료집』 2, 852-853 872 890 892쪽 등 참조. 63) 『편책』(국가기록원 소장, 문서번호 경무 88-38, 1909), 1515-1521쪽. 64) 위와 같음. 65) 『편책』, 『독운사』 13, 137쪽. 66) 『편책』, 위의 책, 737-738쪽. 67) 그 대표적인 사례로 柳宗汝 의병부대를 들 수 있다. 유종여 부대가 민폐를 많이 끼친다는 사실이 널리 알려짐으로써 민간인 사이에 의병에 대한 인식이 매우 나빠졌다. 이에 의병장 金永燁이 유종여를 힐책하였다. 이에 불만을 품은 유 종여는 김영엽을 기습, 살해하였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의병장 김공삼과 박포대가 유종여를 체포하여 죽이려다가 도 망하는 바람에 실패하고 말았다. 그후 유종여는 의병장 申昌學 의병부대에 의해 피살되었다(「호남의병장열전」, 『자 료집』 2, 653 656 665쪽 등). 이러한 점으로 보아 김용구가 유종여의 부하를 살해한 것도 이 사건과 관련되리라 생 각된다. 즉, 의병을 가장하여 민폐를 자행하는 유종여 의병부대에 대한 응징의 한 수단이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