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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6 민주장정 100년, 광주·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군용금을 할당하여 해결한 경우도 있었다. 영광에서 활동하는 의병부대들도 그러하였는지는 잘 알 수 없다. 다만, 친일파나 부호들로부터 군자금을 징발한 경우도 있었다. 49) 혹은 의병들을 후원하는 경우 도 없지는 않았다. 예컨대, 고창출신 金致坤이나 朴永建 등이 그들이다. 이들은 호남창의회맹소의 활 동을 재정적으로 뒷받침해준 숨은 공로자들이었다. 50) 이밖에도 공전영수원들이 수취한 세금을 빼앗 아 군자금으로 활용하기도 하였으며, 법성포 租倉에 보관된 세곡을 징발하여 사용하기도 하였다. 51) 확보한 군자금으로는 전투력을 배가시키기 위하여 무기구입에 정성을 쏟았다. 전해산 의병부대의 경우 활동지역에서 천주교를 포교중인 외국인 신부를 일부러 찾아가 신식무기의 구입을 의뢰한 적도 있었으며, 52) 다른 한편으로는 목포의 청국인들로부터 총기와 탄약을 매입한 경우도 있었다. 53) 영광에 서 활동하는 다른 의병부대의 경우에도 비슷하였으리라 짐작된다. 당시 해안지방을 통하여 신식무기 가 많이 거래되고 있다는 사실은 널리 퍼져 있었다. 54) 물론 제작이 용이한 화승총이나 탄환은 대부분 자체적으로 조달하였을 것이다. 한편, 의병들은 숙식을 어떻게 해결하였을까. 먼저 식사를 해결하는 방법을 알아보자. 영광과 가까 운 장성을 무대로 활동한 김영백 의병부대의 경우, 평소에는 대체로 주민들로부터 제공받았다. 55) 때 론 주민들의 부담이 지나치게 클 경우에는 돈을 지불하기도 하였다. 56) 아마도 영광에서 활동하던 의 병들도 앞서 설명한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았으리라 짐작된다. 또한 의복이나 신발 등의 경우에도 구 매나 할당, 기증 등의 방법으로 조달한 것 같다. 57) 의병들은 대체로 유격전에 어울리는 복장을 착용한 듯하다. 즉, 다갈색 계통이나 하얀 색 혹은 붉은 색의 옷을 입은 것으로 나타난다. 58) 신발의 경우에는 의병들이 주민들로부터 草履를 징발한 것 59) 으로 보아 주로 짚신을 신었던 것 같다. 다음으로 의병의 숙박문제에 대해서는 의병장 김영백의 진술을 통해 알아보자. 60) 그에 따르면, 여름 에는 날씨가 포근하였기 때문에 대체로 露宿을 하였으며, 추운 겨울에는 마을에 분산·투숙하면서 철 저한 경계를 펼친 것으로 되어 있다. 산에서 숙영하는 경우에도 일본 군경의 기습을 우려하여 숙영지 에 경계초소를 설치하고 참호를 구축할 정도로 신중하게 행동하였다. 61) 또는 깊은 산중에 위치한 寺 刹을 이용하기도 하였다. 영광의 경우에는 佛甲山에 있는 佛甲寺와 海佛庵 등의 사찰이 의병들에게 49) 『편책』, 『독운사』 13, 684-685쪽과 같은 책 14, 115쪽 참조. 50) 「호남의병장열전」, 『자료집』 2, 669-670쪽. 51) 위의 책, 628 633쪽. 52) 「전해산진중일기」, 『자료집』 2, 865-866쪽. 53) 『편책』, 『독운사』 13, 368쪽 및 같은 책 14, 612쪽 등이 참고된다. 54) 黃玹, 『梅泉野錄』, 410쪽. 55) 『편책』(국가기록원 소장, 문서번호 경무 88-38, 1909), 1515-1521쪽. 56) 「전해산진중일기」, 『자료집』 2, 380 386 400쪽 등. 57) 이와 관련된 사실은 「전해산진중일기」에 자주 언급되고 있다. 58) 『편책』, 『독운사』 13, 138쪽. 59) 『편책』, 위의 책, 101쪽. 60) 『편책』(국가기록원 소장, 문서번호 88-38, 1909), 1515-1521쪽. 61) 『편책』, 『독운사』 10, 30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