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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 민주장정 100년, 광주·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의 義를 擧하여 모름지기 國賊을 掃退하여 皇治를 바르게 하고 國本을 안전하게 할지어다. (중략) 이 에 大小人民에 通告하노니 切願컨대 人民은 이에 李朝를 復國한 뒤에 기다려 지휘를 받을 지어다. (중 략) 本義所는 이에 大事를 唱道하여 맹세코 무고한 양민을 火中에서 救出하고 我疆土를 안전히 光復 하는데 있다(『편책』, 『독운사』 8, 523쪽). 위의 인용문에 나타나 있듯이, 당시 의병들은 국왕보다는 국가의 안위, 즉 국권의 회복을 무엇보다 중요시하였음을 알 수 있다. 전기의병 당시와는 상당한 변화를 찾을 수 있는데, 근왕의병을 자처하던 것에서 조선의 復國을 우선시하는 방향으로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이와 함께 무고한 국민들 을 일제의 압박에서 구출하려는 의도도 잘 드러나 있다. 이러한 목표아래 이들은 일본 제국주의세력을 몰아내기 위해서는 우선 전투력을 확보해야 했다. 이 는 곧 의병의 모집을 의미할 것이다. 김용구의 경우에는 앞서 본 바와 같이 일심계라는 형태로 동지 를 규합하였다. 그가 유생이었으므로 일심계는 자연히 유생을 중심으로 결성되었다. 따라서 김용구 의병부대의 주요 구성원은 대체로 유생들이 많았다고 믿어진다. 이를테면 金炯植 朴溶根 吳泰允 李英 華 鄭熙冕 李鍾宅 등이 이들이다. 이들은 김용구의 族叔인 김형식을 제외하고는 모두 일심계원으로서 1907년 음력 8월에 창의하여 영광읍을 공격하기 직전에 일반의병을 불러모으는 일을 적극 추진한 인 물들이다. 33) 수백명의 의병을 모은 이들은 조직을 정비하여 1907년 음력 8월 12일에 영광읍 공격에 나섰다. 34) 한편, 실제 전투를 수행하는 의병들은 대체로 영광지방의 농민들이었을 것이다. 영광과 장성에서 주 로 활동한 李哲衡은 그의 부하들이 대부분 영광군 내동·외동·병삼면 출신이라고 말한 점, 35) 장성출 신의 의병장 金永伯 역시 자신의 출신지역에서 의병을 모았으며 그들은 대부분 농민들이라고 언급한 점 36) 으로 보아 그러하다. 그러나 농민들로 구성된 의병부대의 경우 전투력이 뛰어날 수는 없었다. 이에 의병의 수뇌부는 전투 력을 향상시키기 위한 방안의 하나로써 민간인중에 사냥군이나 포군을 모집하거나 징발하였다. 영광 에서도 사냥군을 의병으로 가담시키려는 노력을 지속적으로 진행하였다. 37) 요컨대, 영광의 의병을 주 도한 인물들은 계의 형태를 이용하여 주요 구성원을 충원하는 한편, 다른 한편에서는 출신지를 배경 삼아 농민들과 포수들을 의병으로 가담시켰다. 영광의병들은 아래의 <표>에서 알 수 있듯이, 기삼연과 김율의 의병부대에서 활동한 경우가 많았다. 이는, 다시 말해 호남창의회맹소의 계통이라 할 수 있다. 다만, 호남창의회맹소 중에서도 김율의병부 33) 김용구, 『의병실기』, 15쪽. 34) 위와 같음. 35) 『暴徒招撫에 관한 編冊』(국가기록원, 문서번호 경무 88-31, 1908), 880쪽. 36) 『編冊』(국가기록원 소장, 문서번호 경무 88-38, 1909), 1515-1521쪽. 37) 『편책』, 『독운사』 8, 489·519쪽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