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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말의병 197 <표> 영광에서 활동한 호남창의회맹소의 주요 인물 성 명 직 책 연령 字 - 號 신분 거 주 지 學統 一心契員 與 否 奇三衍 大將 57 景魯-省齋 양반 전남 장성 蘆沙 ○ 金容球 統領 46 有聲-後隱 양반 전남 영광 松沙 ○ 金 準 先鋒將 30 泰元-竹峰 양반 전남 나주 ○ 李哲衡 中軍將 38 양반 전남 영광 省齋 ○ 朴慶來 砲射將 36 道京-砲大 중인 전북 고창 ○ 李淳植 監器 英華-大克 양반 전남 영광 ○ 위의 표에서 볼 수 있듯이, 영광에서 활동했던 의병장들은 모두 일심계 출신임과 동시에 호남창의회 맹소의 주요 직책을 맡고 있다. 이들 외에도 김율과 전해산은 나중에 참여하였으므로 호남창의회맹소 의 일원으로 파악해도 어긋나지 않을 것이다. 또한 朴京旭의 경우에는 전해산 의병부대의 左翼將으로 활동하였다. 18) 요컨대, 영광지방의 의병활동은 호남창의회맹소의 결성을 전후하여 본격화되었으며, 이들이 바로 호남창의회맹소를 주도하였다고 해도 크게 어긋나지 않을 것이다. 영광에서 활동한 의병장 가운데 대표적인 몇몇 인물들의 간단한 인적사항과 그들이 어떤 과정을 거쳐 의병장에 이르렀는지를 살펴보기로 하자. 먼저 통령 김용구는 영광군 대마면 화촌리 출신으로 1862년에 태어났다. 19) 그는 일찍부터 송사 기우만의 문하에서 학문을 익힌 양반유생이었다. 따라서 1894년 수많은 농민들이 가담한 동학농민전쟁이 전라도 전역을 휩쓸 때에도 그는 성리학적 지배체제 를 고수하기 위해 진력한 보수적인 유학자였다. 그후 그는 국가의 위급한 상황 아래에서도 모친상을 치른 후에야 비로소 의병을 도모하는, 이른바 위정척사의 사상을 지키는 철저한 유생이었다. 아래의 기록이 그것을 말해준다. 병오년(1906 ; 필자주) 봄부터 고을안에 사는 지사들을 찾아보고 국가를 회복할 계획을 꾀해 보았다. (중략) 이때 성재 기옹이 적을 쳐서 나라를 회복하는데 뜻이 있는 것을 알고 내가 그를 찾아가고 옹이 나에게 온 것이 여러달이 되었다. 이에 동지들을 규합해서 一心契를 창설하여 매달마다 서로 모여서 깊이 상의하고 꾀하고 방법을 계획하였다(김용구, 『의병실기』, 14-15쪽). 그는 1906년 모친상을 벗은 후부터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 의병봉기를 계획한 사실을 알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이웃 군읍에 거주하는 기삼연과 모의하면서 지역내의 인사들을 일심계원으로 포섭하였다는 18) 「全海山陣中日記」, 『자료집』 2, 851 853 857쪽 등. 19) 李起南, 「後隱行狀」, 『의병실기』, 10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