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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 민주장정 100년, 광주·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지 잘 알 수 없다. 다만, 위의 글에서 그가 의병을 일으켜 활동하려 할 때에 기삼연이 의병을 일으켰다는 사실이 주목 된다. 기삼연은 호남창의회맹소를 1907년 10월말에 조직하였다. 14) 이러한 점과 관련하여 위의 인용 문을 음미한다면, 이대극 역시 의병을 조직한 시기가 1907년 후반으로 추정된다. 다시 말해 「삼의사 행장」을 저술한 고광렬이 이대극의 창의시기를 1906년으로 잘못 기록하게 된 것이 아닌가 한다. 혹 은, 을사조약의 체결직후인 1906년 봄에 이대극이 의병을 일으키려 했던 사실을 지나치게 비약한 것 으로 볼 수도 있지 않을까 한다. 이상과 같이 을사조약이 체결된 이후에도 국권을 회복하기 위한 영광지방에서의 의병봉기의 구체적 인 사실은 찾아지지 않는다. 1905년을 전후하여 영광에서는 소극적인 항의의 표시로서 자결이나 의 병을 일으키려는 계획을 모색하는 태동단계였다고 생각된다. 1-2) 영광의병의 주도인물과 활동 1907년 7-8월을 전후하여 한국은 일제의 정치·군사·경제적 침탈에 속수무책이었다. 이에 맞서 한국인의 반일감정이 고조됨으로써 전국 각지에서 의병을 일으키려는 움직임이 본격화되었다. 전남 지역, 특히 영광의 경우에도 예외가 아니었다. 金容球 등이 의병을 일으켰던 것이다. 당시 日帝는 영광을 거점으로 이름을 떨치던 주요 의병장으로 기삼연·김용구·이대극·李哲衡· 金準·金聿 등이라 파악하였다. 15) 일제는 이들과 생사고락을 함께한 영광출신 의병가운데 두각을 나 타낸 인물들에 대해서도 행적을 조사하였다. 16) 1909년 이후 영광을 무대로 활동한 주요 의병장으로는 全海山·이대극·김용구·朴京旭·李起巽·朴道京·鄭大洪·鄭大仁·李化三·徐應五 등이다. 17) 이들은 적게는 수십명에서 많게는 수백명의 의병을 지휘한 의병장들이다. 그런데 이들은 1907년 10월 전남 장성에서 결성된 호남창의회맹소와 직간접으로 연결되어 있다. 따 라서 호남창의회맹소의 결성 당시 이들의 역할과 관련된 몇 가지의 사항을 살펴보는 것이 이 글의 전 개에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아래의 <표>을 참고하도록 하자. 를 띠었던 것이다. 그 이전에는 의병봉기를 모색한 경우는 있지만, 본격적인 의병활동을 알려주는 자료를 찾기가 힘 들다. 14) 홍영기, 위의 책, 230쪽. 15) 『편책』, 『독운사』 8(국사편찬위원회, 1979), 519쪽 및 같은 책 9, 32쪽. 16) 『편책』, 위의 책 9, 32-33쪽. 17) 『편책』을 수록한 『독운사』 13-19에는 각 도별로 대표적인 의병장을 파악하여 기록되어 있다. 이에 따르면 영광에서 활동한 대표적인 의병장에 대하여 확인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