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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말의병 195 한 후에 春秋의 義理思想에 근거하여 항상 喪服에 白笠을 착용하고서 臥薪嘗膽의 故事를 되새기곤 하 였다. 10) 기삼연은 다시 의병을 일으킬 계획을 수립하다가 발각되어 1902년 체포되어 서울의 平理院으 로 압송되었다가 풀려난 바 있었다. 11) 이처럼 반일적인 활동이 끊임없이 시도되던 1905년 11월에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었다. 이 조약 에 의해 대한제국은 사실상 국권을 상실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당연히 일제의 만행과 이완용을 비롯 한 賣國賊을 강력하게 성토하는 상소문이 잇달았으며, 항의시위도 그칠 날이 없었다. 전남지역에서도 의병을 조직하려는 움직임이 재차 일어났다. 기우만·고광순 등이 그들인데, 그 밖에도 崔益鉉과 白 樂九·姜在天·梁漢奎 등이 앞서고 뒤따르며 전남과 전북 접경을 무대로 의병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면 영광지방에서는 의병봉기의 움직임이 있었을까. 훗날 호남창의회맹소의 統領이 된 김용구는 을사조약의 소식을 듣고서 자결할 생각이었다. (을사 10월) 마음이 아프고 한스러워 잠자코 밥을 먹는 것이 달지 않아 짐승처럼 사는 것이 차라리 사 람으로서 죽느니만 같지 못하다하여 여러번 자살하려 하였다. 그러나 돌이켜 생각하면 이미 죽기로 써 마음만 먹었으면 한놈의 원수와 적이라도 죽이고 죽는 것이 한결 죽어서 유익함이 없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는가(김용구, 『義兵實記』, 영광향토문화연구회, 1988, 14쪽). 그는 자결이 최선의 방법이 아니라고 판단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1906년부터 의병을 일으킬 준비에 들어갔다. 국권을 회복하는 길은 오직 무력투쟁으로서만 가능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우선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을 모으기 위해 契의 형태를 빌어 동지의 규합에 나섰다. 12) 한편, 을사조약의 체결직후에 영광출신의 李大克이 의병을 일으킨 것으로 전해진다. 아래의 인용문 이 그 점을 시사한다. 병오년 봄에 국권이 적의 손아귀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분히 여겨 이에 의병을 일으켜 영광의 적을 선뜻 쳐부수고 바야흐로 기세를 떨치는데, 마침 기성재가 장성에서 의병을 일으켰다는 말을 듣자 바 로 가서 보고 여러 가지를 의논한 끝에 지기가 서로 합하여 마침내 군사를 합하기로 허락했다(고광 렬, 「三義士行狀」, 『자료집』 3, 300쪽). 위의 글에 의하면 이대극이 병오년, 즉 1906년 봄에 의병을 일으킨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와 관 련된 내용을 알려주는 자료는 전혀 찾을 수 없다. 13) 따라서 1906년 봄에 그가 과연 의병을 일으켰는 10) 「송사집」, 『자료집』 3, 36쪽. 11) 홍영기, 『대한제국기 호남의병 연구』, 225쪽. 12) 김용구, 『義兵實記-統領 金容球-』(영광향토문화연구회, 1988), 14-15쪽. 13) 을사조약이후 전남지역에서 의병을 일으킨 사례는 손꼽을 정도에 불과하다. 그것도 대부분 1906년 여름이후에 일으 켰다. 즉, 최익현이 1906년 6월 정읍 순창 곡성 등지에서 의병활동을 전개한 후에 전남지역에서의 중기의병이 활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