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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말의병 193 같은 일본의 만행과 내정 간섭에 대하여 한국인들은 즉각 반발하였다. 명망있는 유생들과 전직 관료 를 중심으로 의병을 일으켜 왕비를 살해한 일본에 대한 복수를 다짐하는 의병이 전국 곳곳에서 일어 난 것이다. 전라남도의 倡義 움직임은 다른 지역보다는 다소 늦었다. 그것은 동학농민전쟁의 상처가 채 아물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지역의 의병봉기는 보수적인 유림의 고장이라 일컫는 長城과 羅州를 중심으로 본격화하였다. 장성의 의병봉기는 蘆沙 奇正鎭의 門人들에 의해 주도되었다. 奇宇萬 奇三衍 高光洵 金翼中 鄭義林 등이 그들로서, 이 가운데 기우만이 핵심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노사의 친손자로서 학통을 계승하였 을 뿐만 아니라 이미 수많은 문인들이 호남 각지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그러한 배경을 기반으로 기우 만이 의병을 일으키는 핵심적인 역할을 맡게 된 것이다. 기우만은 단발령이 내린 직후 국왕에 상소하여 그 부당성을 성토하자는 통문을 각읍에 돌린 바 있었 다. 3) 그후 그의 상소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국왕을 보호하고 국가를 지키기 위한 의병을 일으키자고 호소하는 격문을 각지에 발송하였다. 그는 1895년 음력 12월부터 창의할 것을 계획해오다가 이듬해 정월에 본격적인 거사준비에 들어갔다. 음력 2월 초 長城鄕校를 본거지삼아 의병을 모집하는 한편, 호남 각지에도 연락하여 호응할 것을 호소하였다. 영광에 거주하는 유생들에게도 연락이 닿았다. 그러나 장성의병에 영광출신 인사들이 적극 호응한 것 같지는 않다. 기우만의 문인이자, 1907년 후반에 의병을 일으킨 김용구의 경우만 하더라도 늙은 모친을 모시기 위해 참여하지 않았었다. 그는 정신적인 후원과 전략의 수립에 기여하였을 뿐이다. 4) 『六峰遺集』을 남긴 李鍾宅 역시 기우만의 문인이었지만, 그도 직접 가담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5) 이렇게 보면 기우만이 주도하는 의병봉기에 참여한 영광의 유생들을 비롯한 유력인사들은 거의 찾아 지지 않는다. 다만, 정신적인 후원이나 물질적인 지원에 머물렀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아진다. 한편, 장성의병에 이어 나주에서도 의병이 일어났다. 나주의병은 향교에 기우만의 격문이 도착되면 서 본격화되었다. 기우만은 장성에서 의병을 일으키는 한편, 일본과 서구 열강의 구축, 개화파의 처단 및 국왕의 환궁을 요구하는 격문을 나주향교에 보내어 창의할 것을 촉구하였다. 이에 나주의 유생들 과 吏族들이 연합하여 의병봉기를 서두른 것이다. 당시 나주는 개화파 관리인 參書官 安宗洙의 강압 적인 개혁조치에 반발하고 있던 중이었다. 이에 편승하여 유생들과 이족들이 연합하여 의병을 일으키 게 된 것이다. 6) 나주의 유생들과 이족들이 창의하려 하자, 그것을 저지하려던 안종수는 끝내 이족들의 손에 피살되 었다. 안종수는 단발을 강요하여 주민들의 원성이 자자하였지만, 특히 그가 자행한 탐학이 이족들의 3) 「송사집」, 『자료집』 3, 23-24쪽. 4) 李起南, 「後隱行狀」, 『義兵實記』(영광향토문화연구회, 1988), 105쪽. 5) 『六峰遺集』 卷首(靈光, 小南齋, 1944). 6) 홍영기, 『대한제국기 호남의병 연구』, 제2부 제1장 제1절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