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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말의병 189 主事에 임명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어수선한 국제 정세와 썩어빠진 정치의 난맥상에 실망하고서 곧 사직하고 말았다. 얼마후 그는 악성 눈병에 걸려 갑자기 시력을 잃었다. 이후, 그는 광양의 白雲山中에 깊숙히 은거하여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이무렵, 그는 을사륵약이 체결되었다는 소식을 듣고서 한동안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하였다. 그는 마음을 다잡고서 의병에 투신할 것을 결심하였다. 1906년 1월, 그는 기우만이 주도하는 谷城의 道東祠 擧義에 참여하였으나, 워낙 호응이 적어 무산되고 말았다. 그러던 어느 날 전북 태인에서 최익현이 의병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는 곧장 태인을 향해 출발하였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최익현의 패전과 서울로의 압송 소식을 듣게 되었다. 이번에도 그는 아쉬운 발길을 돌리지 않으면 안되었다. 광양에 돌아온 그는 새로운 결심을 하게 되었다. 70노구에도 불구하고 의병을 일으킨 최익현에 비하면 자신의 처지가 오히려 낫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는 직접 의병을 일으켜 왜놈을 물리칠 방안을 모색하였다. 우선 그는 장성의 奇宇萬, 창평의 高光洵 등과 연락하며 창의날짜와 장소를 물색하였다. 이들은 의병의 패인이 훈련의 미숙과 무기의 열세에 있다고 판단하였다. 따라서 깊은 산중에서 일정기간 훈련을 하기 위해 지리산 골짜기에 위치한 中大寺에 모이기로 약속하였다. 이 절은 구례군 토지면에 있었으나, 지금은 흔적조차 찾을 수 없다. 1906년 10월경, 백낙구는 자신이 은거해오던 광양의 백운산 자락에 사는 사람들을 의병으로 끌어들였다. 약 200여 명의 의병을 모은 백낙구는 약속한 날짜에 구례의 중대사로 향하였다. 이때가 1906년 11월 5일이었다. 한편, 백낙구의 의병봉기에는 진주의 失職한 郡吏들이 적극 가담하였다. 백낙구는, 1906년 10월에 단행된 관제개혁으로 쫓겨난 이들을 설득하여 의병대열에 합류시킨 것이다. 그런데 연락이 잘못되어 고광순과 기우만이 이끄는 의병부대는 오지 않았다. 이에 광양으로 되돌아간 그는 11월 7일에 광양 郡衙를 점령하여 무기와 군자금을 확보하였다. 274) 이어 순천을 습격할 계획이었으나, 날이 환히 밝아오자 취소하고서 삼삼오오 흩어져 구례의 약속장소에 다시 집결하기로 하였다. 백낙구 역시 李承祖 李道順 李芝相 權昌祿 安致命(致中) 金奉九 등 6명과 함께 구례를 들이치다가 구례군수 宋大鎭에게 체포되고 말았다. 이들은 곧바로 順天分派所로 압송되었으며, 후일 광주로 이감되어 재판을 받았다. 그 가운데 安致命과 金奉九는 순천에서 탈옥하여 화를 면하였다. 275) 나머지 의병들은 뿔뿔히 흩어지고 말았다. 그런데 백낙구 의병부대의 주요 구성원은 대체로 지방제도의 개혁에 불만이 많았던 전직 郡吏들이었던 것 같다. 아래의 인용문이 그러한 사정을 전해준다. 최의 잔당은 끊임없이 민심을 선동 도발하고 있었는데, 동년(1906) 11월4일 본도의 유생으로서 본디 274) 大韓每日申報 1906년 11월 14일자 「光陽匪擾」. 275) 위의 신문 1906년 12월 5일자 「五賊取招」와 1907년 1월 10일자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