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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 민주장정 100년, 광주·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郵便所, 警務署 그리고 日人商家 등이었다. 또한 이들은 여러 가지 문서와 의복 및 일본 상인의 물품 등속을 불태웠고, 洋銃과 탄약 등의 무기류는 노획하였으며, 전주는 파괴하고 전선은 잘라버렸다. 이상과 같은 雙山義所의 의병 활동은 몇 가지 사실을 보여준다. 이들의 공격 목표는 일본세력은 물론이거니와 친일적인 관리들도 해당되었다. 이들이 군아소재지를 공격한 것은 그곳이 바로 친일관리와 일본세력의 거점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공격을 통하여 이들은 전투경험과 신무기를 획득하였다. 이렇게 보면 군아의 공격은 최종목표가 아니라 의병활동의 과정이었을 것이다. 이들의 목표는 우선적으로는 광주를 공격하여 전라도 지방에서 일본세력을 몰아내는 것이었고, 그것이 이루어지면 북상하여 서울의 일본세력과 친일파를 구축함으로써 국권을 회복하는 데 있었다. 그후 이들은 鐵甕山城이 있는 동복으로 들어갔다. 험준한 지형을 배경으로 그곳에서 일정기간 훈련을 쌓아 의병을 정예화하려는 것이었다. 그후 광주를 공격하여 전라도 지방에 침투한 일본세력을 완전히 몰아낸 다음 북상할 계획이었다. 서울의 일본세력과 친일파를 제거하여 국권을 회복하는 것이 쌍산의소의 최종목표였던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광주 공격에 나섰다가 실패함으로써 의병장 양회일을 비롯한 주요 구성원 6명이 체포되었고, 다수의 사상자를 내었으며 무기의 피탈도 적지 않았다. 나머지 의병들은 뿔뿔이 흩어지거나, 다른 의병부대에 가담하여 의병투쟁을 계속했다. 체포된 의병들은 1907년 7월 전남 智島에 유배되었다가, 그 해 12월 순종의 특사로 석방되었다. 유배에서 풀려난 의병장 양회일 등은 쌍산의소의 재기에 노력하였다. 1908년 음력 5월에 양회일은 의병 혐의로 강진헌병대에 다시 체포되었다. 당시 그는 일기를 빼앗기고 수일간 구금되었다가 풀려났으나, 음력 6월에도 장흥헌병대에 세번째 피체되어 7일간의 옥중단식 끝에 순절했다. 이와 비슷한 경우가 이윤선의 행적에서도 발견된다. 그밖에 임낙균과 안찬재는 안규홍 의병부대에서 활동하다가 1909년 10월에 순국했다. 쌍산의소의 주요 구성원들이 호남지역 후기의병의 확산에 크게 기여했던 것이다. 3. 白樂九 의병부대 최익현이 주도한 태인의병이 “과거에 응시하러 가는” 유생과 같다는 지적도 있었지만, 창의를 호소하는 그의 글은 전남 지역 의병의 봉기를 크게 자극하였다. 즉, 백낙구·고광순· 李恒善·姜在天·奇宇日·기우만·양회일 등이 각각 광양·창평·구례·장성·곡성·능주 등에서 의병을 일으키게 된 것이다. 따라서 최익현의 의병봉기는 호남의 의병기운을 일깨웠을 뿐만 아니라 의병항쟁을 고조시키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하였다. 273) 특히, 백낙구의 의병봉기는 순천과 관련하여 주목된다. 그는 전주의 鄕吏 집안으로 짐작된다. 동학농민혁명 당시에 그는 농민군을 뒤쫓는 招討官으로 활동하였다. 그 공로를 인정받아 그는 273) 홍영기, 「호남의병일백년」 35회, 무등일보 1995년 6월 2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