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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혁명 17 제1부 광주-전남의 동학농민혁명 제1장 동학농민혁명의 배경 1. 동학농민혁명의 배경 1) 불법 수탈의 일상화와 동학의 수용 1862년 농민항쟁이 거세게 몰아친 후에도 농민의 요구사항은 여전히 시정되지 않고 더욱 악화될 뿐이었다. 중앙의 정치는 난마처럼 얽혀서 대내적으로는 외척세력의 발호와 세도정치의 폐단이 갈수록 심화되었다. 대외적으로는 서양과 일본세력의 침략이 차츰 노골화됨으로써 국민들의 위기의식은 날이 갈수록 높아졌다. 더욱이 三政의 문란에 따른 관리의 가렴주구는 늘어나는 추세였다. 이미 조선 정부는 산적한 모순을 해결할 능력을 상실한 상태였던 것이다. 19세기 후반 전라도는 물산이 풍부하여 국가 자원의 절반을 조달하였을 뿐만 아니라 담세율도 전국의 1/2를 할당받을 정도였다. 전라도의 재물이 풍부하자 서울의 권세가들은 “아들을 낳아 호남에서 벼슬을 살게 하는 것이 소원”이라는 말이 떠돌 정도였다. 1) 당시 외척들의 세도정치가 장기화되면서 매관매직과 삼정의 문란이 극심한 상황이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이양선의 잦은 출몰과 강화도 침공 등 대외적 위기의식이 비등하였지만 왕실과 조정의 대처는 무능하기 짝이 없었다. 결국 1876년 강제 개항으로 일본과 서구 열강 등에 문호가 개방됨으로써 대다수 농민들은 쌀값 불안정 등으로 더욱 빈곤화되었다. 쌀과 콩 등 대일 불평등무역 과정에서 일부 매판상인이나 지주들은 엄청난 폭리를 취하여 거부로 급성장한 반면, 대부분의 농민들은 소작료의 폭등과 물가 폭등을 감당하기 어려운 지경에 처한 것이다. 이 틈을 타서 전라도에 파견된 지방관과 지방의 하급관리였던 향리들은 盜跖과 倀鬼가 되어 백성들의 살을 바르고 뼈를 깎을 정도로 수탈했으며, 특히 전주 감영의 아전들은 감사의 권위를 끼고 모든 고을을 집어 삼킬 정도로 그 기세가 등등하였다. 오죽했으면 興宣大院君 李昰應은 전라도의 1) 황현, 김종익 옮김, 『국역 오하기문』(역사비평사, 1994), 6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