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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말의병 187 가장 대표적인 의병장 안규홍의 창의에도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쌍산의소의 의병활동이 실패로 돌아가자, 일부 낙심한 인물들은 입산·은거하는 경향을 보였다. 의병장 양회일은 가산을 정리하여 군자금을 조달하였다. 그는 자신의 재산은 물론이거니와 친척의 전답까지 팔아서 쌍산의소의 재정을 충당하였다. 또한 인근지역의 우국지사들로부터 협조를 받았는데, 임노복과 안찬재 등은 자신의 집에서 의병들의 숙식을 제공했다. 차재문 역시 군수품을 지원해주었고, 중군장 임낙균의 동생인 林興均은 賭租 1백석을 군량으로 내놓았다. 양회일은 봉기에 앞서 쌍산의소의 부서를 정하고 대오를 편성하였다. 의병장인 맹주 아래에 副將 ·선봉장·중군장·후군장·호군장·총무·서기·謀士·軍醫·도포장 등으로 대강의 체제를 갖추었다(위의 [표] 참조). 창의에 필요한 준비를 갖춘 의병장 양회일은 誓告軍中文을 발표하여 의병으로서 갖추어야 할 구체적인 행동지침을 시달하였다. 주요 내용을 적어보면 다음과 같다. ·一 . 군자금 3천량은 이미 스스로 준비했으므로 村民들을 절대로 침탈하지 말 것. ·一 . 기계와 병장기는 지난해 도적 방어시 관으로부터 지급받은 대포 30문, 소포 50정을 현재 각 마 을에서 민포들이 응용하는 중인데 모두 거두어 들일 것. 一. 정정당당하게 의병의 바른 이름을 우선시 하고 행군시에는 평민들에게 해를 끼치지 말 것. 一. 선봉장 중군장 후군장 등 諸將은 각기 맡은 임무를 수행하고 서로 권한을 침해하지 말 것. 一. 都砲將은 포군을 이끌고, 步卒將은 보군을 이끌며 각기 부서를 정하여 위반하지 말 것. 一. 위의 제 사항은 각기 모두 준수하고 위반하지 말 것, 만약 위반하면 군율로 처단한다. 여기에서 강조된 사항으로는 의병의 민간침탈 금지, 무기의 획득방법과 지휘계통의 확립 등이었다. 쌍산의소의 의병활동은 1907년 양력 4월말에 시작되었다. 이들은 먼저 능주를 공격하였으며, 이어 화순을 점령하였다. 당시 신문 보도에 의하면, 兩郡匪徒 綾州及和順等郡에 匪徒가 猖獗한다함은 前報에 已揭어니와 該郡守의 報告를 據한즉 陰三 月十日에 不知何許人 百餘名이 各持銃劍하고 攔 入綾州郡하여 惹鬧無雙에 所在洋銃을 任意奪去하였 으며 同日에 和順郡에도 義兵이라 稱하는 者 百餘名이 各持軍物하고 本郡主事廳에 先入하여 打破窓 戶하며 郵便所의 文簿와 衣衾等物을 沒收燒火하고 且入警務署하여 亦破門窓하며 補佐員의 文簿를 燒燼하고 場市에 居留하는 日人家에 突入하여 諸般什物을 沒收 燒火하고 散歸之路에 電桿木 一株를 斫伐하고 電線도 絶斷하였다더라(皇城新聞 1907년 5월 15일자 「雜報」). 고 전한다. 즉, 이들이 공격한 곳은 郡衙所在地로서, 주 공격대상은 군아를 비롯하여 主事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