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page

한말의병 185 있는 현실적인 방안을 모색한 변화를 읽을 수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그리하여 쌍산의소는 투쟁역량을 제고하기 위하여 신무기의 구입과 무기의 제작, 더 나아가 의병을 모집하여 증동마을을 배경으로 수 개월동안 훈련을 쌓았다. 그리하여 증동 마을은 의병들의 훈련이 계속되던 1906년 음력 10월부터 이듬해 음력 3월까지 의병기지로 탈바꿈하였다. 이는, 임노복을 비롯한 마을 주민들의 협조없이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런 까닭에 해방이 되자 증동을 의병촌으로 지정해야 한다는 유림들의 公論이 일어났다고 판단된다. 그러면 쌍산의소에 가담한 일반 의병들은 어떠한 사람들이었을까. 다음의 기록이 참고된다. 이에 앞서 1906년 겨울 능주군수 朴龍勳은 도적을 걱정하여 양회일을 都約長에 임명하였다. 아울러 기계와 탄환을 지급하고 방어시설을 설치하였다. 또한 각 坊里로 하여금 총을 사들이게 하였는데, 聲 勢가 상응하였다. 이러한 일을 公으로 하여금 모두 총괄 지휘케 하였다. 그리하여 공은 本里의 날랜 소년 수십명과 더불어 날마다 무예를 연습하였다. 혹은 서로 싸우고, 군사에 관한 시험을 치르기도 했다. 이는 훗날의 계책을 도모한 것이다. 1907년 음 3월에 마침내 家産을 기울여 義旅를 규합하였다 (『杏史實紀』 권 4, 「倡義時事蹟). 즉, 1906년 겨울에 능주군수 朴龍勳 267) 이 민간인 중심의 防盜組織을 적극 후원하였고, 그것을 총괄하는 都約長에 양회일을 임명하였다는 것이다. 능주에서 이러한 논의가 진행된 것은 전혀 특수한 사례는 아니다. 당시 이른바 화적들이 전국에 걸쳐 횡행하자, 이에 대처하는 다양한 논의가 신문을 통해서도 자주 제기되었다. 그 대처 방법으로는 富豪中心의 방도조직을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이 많았다. 268) 또한 혼란기에 도적이 봉기하는 것은 정치가 붕괴되었기 때문이라고 하면서 군수 선정에 신중을 기하고 법률을 공평하게 적용하는 방법으로 ‘ 戢 盜方略’을 제시하는 경우도 있었다. 269) 그 내용 가운데에는 인근 마을끼리의 협조와 순찰 강화, 도적 체포자에 대한 포상, 부호의 부담에 의한 장비 구입 등의 내용이 들어 있다. 270) 능주에서도 이러한 분위기에 따라 군수의 후원으로 방도조직이 만들어졌는데, 그것을 총괄하는 도약장에 양회일이 임명되었다. 271) 양회일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방도조직을 의병부대로 전환시킬 267) 朴龍勳은 1905년 10월에 능주군수에 부임하여 1907년 음력 정월에 依願免官하였다(大韓每日申報 1905년 10월 11 일자와 『綾州地志·邑誌集成』, 217쪽 참조). 268) 大韓每日申報 1906년 2월 15일자 「剿賊方略」. 269) 皇城新聞 1906년 4월 13·14일자의 논설 「戢 盜方略」 참조. 270) 위의 신문 1906년 5월 1일자 「雜報」. 271) 1904-1905년 경부터 ‘火賊’이라 불리는 집단이 전국적으로 크게 날뛰었음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국가에서는 이에 대해 행정력만으로는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없게 되자, 각 행정구역별로 민간 위주의 防盜組織의 결성을 지원 하였던 것 같다. 그리하여 綾州에서도 郡守의 지원 아래 민간 중심의 방도조직이 생겨난 것이다.· 그런데 梁會一은 어떻게 都約長이 되었을까. 『杏史實紀』 권 3, 「家狀」(梁會龍)에 “甲辰乙巳之間 山野盜賊 竝起攘奪 一日夜群盜數十 入公家 全里奔避 公出而喩之曰 今民生塗炭 無以聊生 汝等不勝飢寒 相率爲盜 豈爾本心 遂設廣席于庭 炊飯食之 又賜 布匹 盜感而去”라고 하여, 1904-1905년 경에 도적떼가 침입하자, 그것을 梁會一이 슬기롭게 막아냈다는 것이다. 綾州郡守 朴龍勳은 바로 이 점을 높이 사서 그를 都約長에 임명하지 않았나 한다. 물론 그가 능주의 名望있는 儒生 이라는 점도 고려되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