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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말의병 181 “少亦崔益鉉氏며 老亦崔益鉉氏오 生亦崔益鉉氏며 死亦崔益鉉氏로다” 250) 라며 추모하였다. 大韓每日申報에서도 “我東之夫子 勉菴崔先生” 251) 이라 찬양하였고, 그 뒤에도 면암을 추모하는 글을 여러 번에 걸쳐 게재했다. 252) 또한 면암이 순국한 이후에 여러 지역에서 그를 추모하는 사당건립이 추진되었다. 즉, 그의 문인들을 중심으로 沃溝·抱川·定山·泰仁·谷城·咸平 등 6곳에 사당이 건립되었다. 253) 한편, 그는 해주의 華西 李恒老의 影堂에 배향되었으며, 문집도 간행되었다. 당시의 상황에 대하여 일제는 崔의 잔당은 끊임없이 민심을 선동 도발하고 있었는데 동년 11월 4일 본도의 유생으로서 본디 崔益 鉉을 따르는 光陽郡의 白樂九, 長城郡의 奇宇萬, 昌平郡의 高光洵 李恒善 등이 관제개혁으로 실직한 前 郡吏 등과 通謀하여 求禮郡 中大寺에 모여 총원 50여 명(총기 10여 정)으로써 다음날 5일에 거사 (『暴徒史』, 21-22쪽). 라고 하였듯이, 태인의병의 영향을 받아 전남 각지에서 의병이 봉기하는 상황을 보여준다. 최익현의 뜻을 계승한 인물로는 백낙구·기우만·고광순·이항선 등을 들었으나, 그밖에도 姜在天·奇宇日 등도 포함된다. 254) 태인의병의 영향을 받은 인물들을 대략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강재천을 들 수 있다. 그는 태인의병의 실패에 자극받아 1906년 9월에 임실에서 거병하여 운봉과 남원·장성 등지를 무대로 의병활동에 나섰다. 255) 그는 면암을 對馬島에서 환국시키고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 거의했다는 점을 천명하였다. 다음으로 백낙구는 동학농민전쟁시 招討官을 지내고 主事를 역임한 인물이다. 256) 그후 그는 視力을 잃게되어 광양에 隱居 중이었다. 그는 태인의병에 합류하려다가 해산되는 바람에 돌아왔으나 1906년 11월을 전후해서 다시 의병을 일으켰다. 그리고 吏族 출신인 梁漢奎 역시 태인의병의 해산에 격분하여 1907년 2월에 남원에서 봉기한 바 있으며, 257) 朴鳳陽도 운봉의 吏族으로서 양한규와 인척관계였는데, 운봉을 기반으로 의병을 도모하려다 발각되어 체포된 적이 있었다. 258) 250) 皇城新聞 1907년 1월 14일자 논설 「弔故贊政崔益鉉氏」. 251) 大韓每日申報 1907년 1월 6일자 「通諭哀文」 252) 예를 들면 대한매일신보 1907년 1월 12일자 「哭送忠魂」, 1월 20일자 「哭勉菴崔先 生文(權學準)」, 4월 25일자 「崔 勉庵疏本」, 5월 16일자 「祭勉菴崔先生文(李炳憲)」 등이다. 253) 송상도, 앞의 책, 104쪽. 254) 『폭도사』, 22쪽 및 홍순권, 앞의 책, 91쪽 참조. 255) 鄭喬, 『大韓季年史』 下(국사편찬위원회, 1957), 220쪽. 256) 황현, 『매천야록』, 395쪽과 홍영기, 무등일보 1995년 6월 28일자 「호남의병 일백년」 제36회 ‘盲人 의병장 白樂九’ 참조. 257) 위의 책, 406쪽과 송상도, 『기려수필』, 112-113쪽. 258) 大韓每日申報 1907년 6월 9일자 「兩씨放免」과 『전북의병사』 하, 61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