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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 민주장정 100년, 광주·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지시하였다. 242) 그러나 해산을 거부하고 남은 사람이 100여 명이나 되었으며, 재차 해산을 촉구해도 21명이 면암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243) 그후 전주진위대가 이들을 강제로 해산하는 과정에서 鄭時海가 총에 맞아 絶命하였다. 6월 14일(윤 4월 23일)에 진위대는 면암을 비롯한 13명을 모두 체포, 서울로 압송하였다. 이때 최익현과 끝까지 자리를 같이한 제자들을 이른바 ‘12義士’라고 한다. 임병찬을 비롯한 고석진·김기술·최제학·文達煥·林顯周·梁在海·趙愚植·趙泳善·羅基德· 李容吉·柳海瑢 등이 그들이다. 244) 이들이 모두 체포됨으로써 마침내 태인의병은 해산되고 말았다. 태인의병이 일제에 빼앗긴 무기로는 火繩銃 30정, 軍刀 40本, 화살 2駄 , 탄약 6袋, 성곽주위 방어용 鐵製 三本釘 약 5만개, 小砲 1문 등이었다. 245) 이들이 방어용 鐵製釘을 다량으로 확보한 점으로 보아 일정지역을 점거할 계획이었음을 알 수 있다. 1-3) 태인의병의 영향 피체된 태인의병은 일본군 헌병사령부에 끌려가 정부관료와의 연루설 및 고종의 密旨說과 관련하여 집요한 추궁을 받았다. 246) 그러나 아무 것도 입증되지 않자, 1906년 8월 14일 일제는 이들에게 軍律違反罪를 적용하여 최익현을 對馬島 감금 3년, 임병찬 감금 2년, 고석진·최제학을 군사령부 감금 4개월, 나머지는 笞刑 100대를 宣告하였다. 247) 최익현과 임병찬은 8월 27일에 대마도의 嚴原에 소재한 일본군 衛戍營으로 압송되었다. 그후 최익현은 1907년 1월 1일(음 1906. 11. 17) 새벽에 대마도에서 순국하였음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약 열흘만에 태인의병의 활동은 종식되었지만, 이들이 호남지역의 후기의병에 미친 영향은 예상보다 훨씬 컸다. 1907년 후반에 시작된 후기의병의 주무대가 전라도였다는 점을 보더라도 태인의병이 기폭제의 역할을 했으리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전라도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 태인의병의 영향이 퍼졌음은 물론이다. 그것은 대마도에 끌려간 최익현 일행이 온갖 고초 끝에 순국한 사실이 전국에 널리 파급되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면암의 장례행사에는 수만명의 인파가 몰려들었으며 일제는 변고가 생길까 전전긍긍할 정도였다. 248) 장례를 치른지 1년 반이 지난 1908년 9월에도 면암의 靈前을 방문하는 사람들이 그치지 않았던 것 같다. 당시 면암의 묘소를 방문한 黃玹은 弔客錄이 4책이나 되더라는 기록을 남긴 점 249) 에서 그러하다. 당 시 의 언 론 에 서 도 최 익 현 의 순 국 을 대 서 특 필 하 였 다. 예 컨 대, 황 성 신 문 에 서 는 논 설 에 242) 임병찬, 앞의 책, 206-207쪽. 243) 위의 책, 207쪽. 244) 황현, 『매천야록』, 382쪽. 245) 『고문경찰소지』, 122쪽. 246) 최제학, 앞의 책, 97쪽. 247) 萬歲報 1906년 8월 17일자 「義魁處律宣告」. 248) 황현, 『매천야록』, 402쪽. 249) 위의 책, 40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