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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 민주장정 100년, 광주·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영향이 비교적 적게 미치는 지역에 전달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담양의 용추사에 모인 노사학파의 입장을 배려한 것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의병을 일으키는 방법론과 목적, 주도권 문제로 양자의 입장에는 차이가 없지 않았다. 또한 이들은 일본의 우월한 군사력을 인정한 점에서는 인식을 같이하였으나, 일본세력을 물리치는 방안에서 차이가 있었다. 이미 앞에서 보았듯이, 태인의병은 의병활동을 토대로 한 對日外交談判論을 제기하였다. 기우만 등은 上京上疏나 聯名上疏를 전개하는 한편, 열강에 호소하는 외교적 노력과 일제를 聲討하는 활동을 병행한다면 싸우지 않고도 국가를 보존할 수 있다고 보았다. 226) 양자 사이에 대응방법이 서로 달랐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그보다는 호남지역에서 누가 의병을 주도할 것인가의 문제로 갈등이 빚어졌던 것 같다. 227) 당시 태인의병의 지도부는 장성의 기우만의 협조를 얻어 나주로 들어가 그곳을 근거지로 삼으려는 案과 남원을 점령한 후 박봉양과 협력하여 운봉으로 들어가 영남 右道의 호응을 얻으려는 案 중에서 하나를 선택할 계획이었다. 228) 이는, 동학농민전쟁 당시 나주와 운봉이 농민군의 수중에 떨어지지 않았던 점을 주목한 것으로 보인다. 아다시피 나주목사 閔種烈과 나주의 유생 및 이족들이 단결하여 나주읍을 굳게 지켰으며, 운봉의 경우에는 吏族 朴鳳陽을 중심으로 농민군의 거센 공격을 막아내었다. 229) 지형상으로도 이 지역들은 요충지나 다름없었다. 따라서 태인의병의 지도부들은 그러한 점을 높이 평가하여 나주와 운봉 가운데 웅거할 곳을 선택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기우만과의 협상이 결렬됨으로써 태인의병은 본래 의도했던 목적을 달성할 수 없었다. 다만, 격문과 동맹록의 작성에 합의한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당시 작성된 동맹록에는 면암과 송사를 비롯한 112명이 서명하였다. 230) 담양의 龍湫寺에서 6월 3일(윤 4. 12)에 출발한 면암 一行은 다음날 태인의 武城書院에 도착하여 講會를 열었다. 이미 擧義를 알리는 통문이 사방에 돌려졌으므로 수백명의 유생들이 무성서원에 모여들었다. 강회를 개최한 자리에서 면암의 창의하자는 호소에 80여 명의 유생이 자원하였음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들을 중심으로 隊伍를 편성한 최익현은 곧바로 泰仁鄕校를 근거지삼아 무기를 수집하였다. 이로써 호남지역에서는 을사조약 이후 최초의 의병이 조직된 것이다. 231) 6월 5일 태 인 의 병 은 먼 저 召 募 活 動, 즉 의 병 규 모 의 확 대 에 노 력 하 였 다. 이 들 은 정읍·순창·옥과·곡성·담양 등지를 순회하며 의병의 勢擴散에 힘을 기울였는데, 특히 226) 「松沙集」, 『자료집』 3, 45쪽. 227) 黃玹, 『梅泉野錄』, 382-383쪽. 228) 위와 같음. 229) 황현, 김종익 옮김, 『번역 오하기문』(역사비평사, 1995), 275-277쪽. 이상식·박맹수·홍영기, 『전남동학농민혁 명사』(전라남도, 1996), 267-278·353-355쪽. 한편, 박봉양을 운봉의 세력있는 양반 유생으로 추정한 견해도 있 으나(홍순권, 앞의 책, 90쪽의 각주 27), 이는 사실과 다르다. 230) 최제학, 앞의 책, 67-75쪽. 231) 한편, 최익현이 고종의 밀지를 받아 의병을 일으켰다는 주장도 있다(오영섭, 「韓末 義兵運動의 勤王的 性格」, 『한국 민족운동사연구』 15(1997), 61 63쪽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