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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말의병 177 라고 있듯이, 1906년 3월말경 기우만 등은 의병을 모집하는 통문을 木板으로 간행해서 각 군에 유포했다. 그러자 전라남도 관찰사가 그것을 수거하여 내부로 올려 보냈다는 것이다. 기우만이 통문을 발송한 시기는 늦어도 1906년 2월경이었던 것 같다. 219) 그는 2월말 일본 헌병대에 의해 체포되었다는 소문이 돌았는데, 220) 실제 붙잡힌 것 같지는 않다. 3월초 一進會에서는 기우만 등이 鄕約所를 기반삼아 의병을 일으킬 것이라며 일제의 경찰기관과 全羅南道 觀察府에 보고하였다. 221) 또한 3월말에도 기우만이 작성한 「萬人會同陳疏通文」이 각 군에 나돌자, 그것을 수집하여 관찰부에 올리고, 소지자는 체포하라는 지시가 내려졌다. 222) 이와 같이 전라남도에서도 1906년 2월을 전후한 시기부터 기우만을 중심으로 의병을 일으키려는 시도가 계속되었다. 하지만 기우만의 독자적인 의병봉기가 여의치 않았다. 이러한 사실은 아마도 태인의병을 준비하던 최익현과 임병찬 등에게도 전해졌을 것이다. 따라서 이들은 양자간에 의견을 조정할 필요를 느꼈으리라 생각된다. 이들은 1906년 음력 2월 초에 태인에서 처음 만나게 되었다. 223) 그후 5월 29일(음력 윤 4월 8일)에도 전남 담양의 秋月山에 소재한 龍湫寺에서 최익현과 기우만 등이 만났다. 224) 이들은 호남지역의 대표적인 유생 50여 명과 함께 對日抗戰의 방법을 논의하였다. 그 가운데에는 순창출신으로서 해방후 대법원장을 지낸 金炳魯도 참가했음을 알 수 있다. 225) 이 자리에서 의병을 일으키자는 것에는 모두가 동의함으로써 면암의 이름으로 격문을 지어 각 군에 발송하였으며 동맹록도 작성되었다. 용추사 모임에서 지은 격문의 일부를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宗室·世臣·觀察使·守令 및 선비·농부·工匠·商工·胥吏·僧侶까지도 일제히 분기하여 마음 과 힘을 합쳐 원수 오랑캐를 무찔러 그 종자를 없애고 그 소굴을 불지르며, 역적의 도당을 섬멸하여 그 머리를 베고 그 사지를 찢어서 위태로움을 편안하게 하여 나라의 명맥을 튼튼히 하고 (중략) 위 격 문을 삼가 順天·樂安·興陽·麗水·突山·光陽·長興·寶城·康津·海南·莞島에 통고한다(최제 학, 「면암선생창의전말」, 『자료집』 2, 67쪽). 모든 계층이 단결하여 항일투쟁에 나설 것을 촉구함과 동시에 주로 순천을 비롯한 전남의 동부지역과 서남부의 연해 도서지역에 격문을 발송했다는 점이 주목된다. 다시 말해서 노사학파의 219) 기우만의 年譜에 따르면, 1906년 음력 정월에 곡성의 道東祠에서 거의하려다 사전에 일이 누설되자 중지하였다고 한다(「송사집」, 『자료집』 3, 45쪽). 한편, 그가 1904년 12월에 의병을 조직하였다는 견해도 있으나(오길보, 앞의 책, 117-123쪽), 그 근거를 찾을 수 없다. 220) 金允植, 『續陰晴史』 下, 172-173쪽. 221) 大韓每日申報 1906년 3월 1일자 잡보 「義兵風聞」. 222) 김윤식, 앞의 책, 173쪽과 皇城新聞 1906년 3월 29일자 「有文無人」. 223) 임병찬, 앞의 책, 199-200쪽. 224) 최제학, 앞의 책, 65-67쪽. 225) 김진배, 『가인 김병로』(가인기념회, 1983), 15-16·23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