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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말의병 175 하되 毋或慢忽하여 犯律後悔之地를 幸甚이라 하였는데 發通人은 全南興島居 張濟世 趙安國 裴應天 等 (중략) 此 通文은 市都到日에 卽納于鄕廳하라 하였더라. 위의 인용문은 전북관찰사 韓鎭昌이 內部에 보고한 것을 황성신문에서 게재한 것이다. 209) 의병에 가담할 것과 무엇을 준비해야 하며 언제 어디로 집결해야 할 것인가를 통문으로 계속 전하겠다는 내용이다. 이 글은 음력 3월 1일밤 김제읍 근처의 商店 벽에 게시되어 있었다. 각 군의 鄕長과 首書記 및 주민들에게 보낸 것으로, 鄕廳을 중심으로 전달되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주목되는 사실은 유생들이 주도한 義陣임에도 불구하고 軍律·衣制·器械·規例 등을 매우 구체적으로 제시한 점이다. 예를 들면 당시 태인의병의 지도부는 군율의 경우 군사 비밀을 누설한 자, 겁을 먹고 후퇴하는 자, 부녀를 겁간하는 자 등은 斬首에 처한다고 명시하였다. 또한 복장의 경우 모일 때는 平涼 子와 넓은 소매의 두루마기를 착용하되, 전투복의 상의는 黃色, 戰帶는 靑色, 수건은 紅色으로 염색해서 가져올 것을 지시하였다. 그리고 무기는 창이나 칼·활 등을 각자 지참할 것과 배낭 1개, 軍糧은 각자 2되와 취사도구를 갖추라고 하였다. 심지어 상호간의 軍號를 정하여 비밀의 유지에 만전을 기하였다. 이처럼 의병 가담자에 대한 구체적인 지침이 전달되었다는 점에서 주목되는 것이다. 이는, 임병찬 등이 동학농민전쟁 당시에 농민군을 방어하는 조직을 운용한 경험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통문을 통해 군율을 엄격하게 시행한다는 점과 옷의 형태와 색상, 武器自擔의 원칙 그리고 貴賤보다는 智勇에 의해 선발한다는 점 등을 천명한 것이다. 210) 이들이 표방한대로 실행되었는가의 여부를 떠나 양반유생 중심의 義陣이 군사력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전환되어가는 과정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고 하겠다. 한편, 최익현은 전라도의 태인·진안·운봉 등지를 돌아다니며 의병봉기와 관련된 인사들과 접촉하였다. 211) 하지만 농사철이 다가온 데다 시일이 촉박한 관계로 병기와 군량의 준비가 충분하지 않았다. 이에 임병찬은 면암에게 거병시기를 가을로 늦추자고 건의하였다. 212) 그러나 면암은 일의 성패와는 상관없이 지금도 국가의 위기를 구하자면 시기적으로 이르지 않다며 당장 강행할 뜻을 굽히지 않았다. 결국, 면암의 주장에 동의한 임병찬은 첫번째 거병일자를 윤 4월 6일로 잠정 결정하였다. 충남 恩津의 徐敬淳이 300여 명을 데리고 합류하겠다는 의사를 밝혔기 때문이다. 213) 그러나 일이 여의치 않자, 면암과 임병찬 등은 1906년 음력 윤4월 13일(양 6. 4)에 태인의 武城書院의 講會에서 창의하기로 최종 결정하였다. 214) 209) 임병찬의 『의병항쟁일기』(한국인문과학원, 45-46쪽)에도 같은 내용이 순한문으로 기록되어 있다. 210) 황성신문 1906년 4월 5일자 「全報義通」과 임병찬, 앞의 책, 45-46쪽. 211) 임병찬, 앞의 책, 200-205쪽. 212) 『면암집』 Ⅲ, 169쪽. 213) 최제학, 「면암선생창의전말」, 61쪽. 214) 위의 책, 62쪽과 임병찬, 앞의 책, 204-20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