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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말의병 173 보내어 함께 창의하자고 호소하였다. 그러나 그들중 아무도 면암의 제의에 선뜻 호응하지 않았다. 196) 그러던 중 그는 호남지역의 門人 고석진과 최제학 등을 만나게 되었다. 이들과의 만남을 계기로 면암이 호남으로 내려오게 된 것이다. 최익현은 호남으로 향하면서, 지금 우리는 군사가 훈련되지 못했고 무기도 이롭지 못하니 반드시 각 도, 각 군과 聲勢를 합쳐야만 일이 이뤄질 것이니, 나는 마땅히 남으로 내려가서 嶺·湖를 일깨워 일으켜 湖西와 함께 서로 聲援이 되는 것이 옳지 않겠는가(최제학, 「면암선생창의전말」, 『자료집』 2, 57쪽). 라고 말하였다. 위의 인용문을 통하여 그의 의병방략을 확인할 수 있다. 당시 그는 영남과 기호의 유생인 郭漢一과 南圭振에게도 각자의 근거지에서 의병을 일으키도록 격려하였으며, 華西學派의 同門인 柳麟錫에게 남북에서 함께 호응하자는 글을 보내기도 하였다. 197) 이로써 보건대, 최익현은 뜻있는 인사들과 협력하여 동시다발적으로 의병을 일으키는 전략인 이른바 犄 角之勢를 형성할 목적이었다. 그리하여 일본의 강력한 군사력을 분산시킴으로써 효과적인 반일투쟁을 전개할 수 있으리라 기대했던 것이다. 그가 지역적 기반과 연고가 거의 없는 호남으로 내려온 것도 의병의 연합전선을 구축하여 일제의 군사력에 대응하려는 의도였음이 분명하다. 한편, 면암은 高石鎭의 추천으로 임병찬을 알게 되어 몇 차례의 서신을 주고받으며 의병을 일으키는 방안을 의논하였다. 이때부터 태인의병의 봉기가 본격화되었다. 당시 임병찬은 전북 태인의 鍾石山 아래에 寓居中이었다. 동학농민군 지도자 金開南의 체포에 공을 세운 바 있던 임병찬 198) 에 대하여 면암의 문인들은 호의적인 태도를 보였다. 임병찬은 이미 전기의병 당시에도 자신이 살고 있던 태인군 山內面 宗聖里를 무대로 무기를 수집하고 포수를 모집하는 등 거병준비를 하다가 발각된 바 있었다. 199) 또한 그는 전북 沃溝에서 태어나 옥구와 전주에서 향리로 재직하며 능력을 인정받았으며, 그후 낙안군수에 재직하면서도 善政을 베푼 것으로 알려져 있다. 200) 이러한 점들이 고려되어 면암의 문인들이 임병찬과 서로 손을 잡고 창의준비를 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처음에 완곡하게 거절하던 임병찬은 면암의 眞意를 파악한 후 그에게 進攻退守策을 제시하였다. 201) 임병찬은 1906년 음력 2월 9일 면암에게 보낸 편지에서 전주를 장악하여 의병을 규합한 후에 지리산에 웅거하자고 조언하였다. 그는 험준한 지리산을 배경삼아 장기항전을 모색하였다. 그것은 무기의 열세와 훈련부족 등과 같은 의병의 전투력 한계를 보완하기 위해서는 불가피하다는 판단에서 그러했을 것이다. 196) 최제학, 「면암선생창의전말」, 『자료집』 2, 56쪽. 197) 위의 책, 57-58쪽. 198) 독립신문 1897년 7월 1일자 「잡보」 ; 『독립신문』 제2권, 314쪽. 199) 독립신문 1897년 5월 20일자 「외방통신」 ; 『독립신문』 제2권, 241쪽. 200) 宋相燾, 『騎驢隨筆』(국사편찬위원회, 1971 ; 1985), 104-105쪽. 201) 임병찬, 「答勉菴先生書」, 『義兵抗爭日記』(한국인문과학원, 1986), 6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