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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 민주장정 100년, 광주·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奇宇萬·高光洵 등이 그들로서, 이들은 이미 1896년에 長城義兵을 주도한 바 있었다. 177) 이들 가운데 기삼연은 1902년경 擧義를 도모하다가 체포된 바 있으며, 178) 기우만은 1905∼6년에 호남의병의 재기를 추진하였으나 이렇다 할만한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179) 고광순 역시 1906∼1907년에 호남에서 전개된 의병봉기에 참여하려 하였으나, 모두 좌절되었다. 180) 이 외에도 새로운 인물들이 나타나 호남에서의 의병봉기를 모색하였다. 崔益鉉·白樂九·姜在天 · 梁漢奎·梁會一 등이 그들이다. 이에 본 장에서는 최익현이 주도한 泰仁義兵과 양회일이 주도한 雙山義所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태인의병과 쌍산의소는 여러 면에서 주목된다. 우선 두 義陣을 추진한 세력들은 대체로 명문 유생들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이들이 주도한 의병활동을 살펴봄으로써 호남지역 중기의병의 성격을 파악하는데 도움이 된다. 아울러 이들의 의병활동은 이 지역 후기의병에 큰 영향을 주었다는 점이다. 1. 태인의병 1-1) 태인의병의 주도인물 태인의병의 봉기와 관련하여 日帝는 각종 자료에서 태인의병과 함께 洪州義兵을 중요한 사건으로 인식하였다. 홍주의병은 1906년 5월 하순 홍주성을 점령함으로써 세상에 알려졌다. 181) 을사조약 직후에 봉기한 탓에 양 의진의 동향에 관해 일제는 특별히 많은 기록을 남기고 있다. 그러한 영향으로 말미암아 일본인 연구자들도 홍주의병과 태인의병에 각별한 관심을 나타내었다. 다른 의병부대의 활동보다는 유독 이들에 관하여 관심이 많았던 것이다. 그리고 일제가 홍주의병과 태인의병의 주모자들을 매우 가혹하게 처벌한 점 182) 도 특이하다. 그렇다면 일제는 왜 이들을 주목하였을까. 그 이유는 먼저 양 의진을 이끈 핵심인물에서 찾을 수 있다. 홍주의병은 閔宗植, 태인의병은 崔益鉉이 의병장에 추대되었는데, 이들의 정치적 비중이 매우 177) 申箕善, 「奉使日記」, 『申箕善全集』 下, 312쪽과 李炳壽, 「錦城正義錄」, 『자료집』 3, 75쪽 그리고 李相寔, 「韓末의 民族運動」, 『人文科學』 2(목포대, 1985), 99쪽. 178) 邊相轍·邊萬基, 『鳳棲·鳳南日記』, 503쪽과 「湖南義兵將列傳」, 『자료집』 2, 627·632쪽과 홍순권, 『韓末 湖南地 域 義兵運動史 硏究』, 99-100쪽과 286-287쪽 참조. 그런데 홍순권은, 기삼연이 1902년 2월에 체포되었다고 하였 으나(앞의 책, 100쪽), 실제로는 음력 5월 9일에 체포되었다(변상철 변만기, 『鳳棲·鳳南日記』, 503쪽). 179) 大韓每日申報 1905년 9월 10일자, 같은 신문 1906년 3월 29일자, 「松沙集」, 『자료집』 3, 144쪽, 金允植, 『續陰晴 史』 下(국사편찬위원회, 1960), 172-173쪽 참조. 180) 「湖南義兵將列傳」, 『자료집』 2, 636쪽과 『鹿川遺稿』 下, 「行狀」 참조. 181) 홍주의병에 관해서는 다음의 논문이 참고된다. ① 藤原葽 子, 「義兵運動--1906∼1910--」, 『歷史學硏究』 187(1955). ② 姜秉植, 「韓末 洪州城 義兵에 대한 一硏究--義兵將 閔宗植을 中心으로--」, 『民族思想』 2(한성대, 1984). ③ 田炳喆, 「한말 洪州義兵의 성격」, 『漢城史學』 2(1984). ④ 宋容梓 편, 『洪州義兵實錄』(홍주의병유족회, 1986). ⑤ 柳漢喆, 「洪州城義陣(1906)의 組織과 活動」, 『한국독립운동사연구』 4(1990). ⑥ 金祥起, 「朝鮮末 洪州 義兵의 蜂起遠因과 展開」, 『水邨朴永錫敎授華甲紀念 韓民族獨立運動史論叢』(탐구당, 1992). 182) 일제는 한말의병 가운데 홍주의병과 태인의병의 주모자들을 軍律違反罪를 적용하여 일본의 對馬島에 감금시켰다. 이 점만 보더라도 일제의 의도를 짐작할 수 있다. 즉, 일제가 이들을 軍律로 처벌하여 對馬島에 감금시킨 것은 여타 의 의병들에게 영향을 주지 않으려는 의도였음이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