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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말의병 169 관련해서는 유생 具相淳이 처형되었고, 담양부사였던 閔種烈은 음력 3월 1일 서울로 압송되었다. 171) 그런데 나주의병의 주도인물들은 장성과 담양에 비해 훨씬 무거운 처벌을 받았다. 나주의병의 배후조종자로서 핵심적인 역할을 한 해남군수 정석진은 任地에서 체포되어 나주로 끌려와 효수되었다. 172) 그는 친위대를 따라온 안종수의 동생 安定洙의 농간에 의해 음력 3월 10일에 처형된 것이다. 173) 나주의병의 좌익장을 맡았던 金蒼均과 그의 아들 金晳鉉은 長城에서 포살되었다. 174) 그리고 靈光 鄕吏 丁相燮과 懲役徒 3인 등도 나주에서 체포되어 처형되었으며, 나주의병의 우익장으로 활동했던 朴根郁을 비롯한 朴化實·金錫均 등은 도망하여 겨우 목숨을 건졌다. 175) 이상과 같이, 호남에서 봉기한 전기의병의 경우 정부의 처벌은 양반 유생보다는 주로 향리층에 집중되었으며 그것도 훨씬 가혹하였다. 이는, 나주의병의 향리층이 개화파 관료의 처단을 주도하였고, 이들이 양반유생보다는 신분이 낮은 것과 관련된다고 믿어진다. 한편, 1896년 8월에 地方制度가 23府制에서 13道制로 바뀌었다. 이때 전라남도의 관찰부는 나주에서 광주로 옮겨졌다. 1년전 나주에 관찰부가 설치된 데에는 동학농민혁명때 유일하게 수성했던 관아라는 점이 고려되었다면, 다시 1년후에 관찰부가 광주로 옮겨가게 된 배경에는 나주의병의 봉기가 상당한 영향을 주었으리라 헤아려진다. 이듬해인 1897년에는 전라도의 민심을 안정시키기 위해 암행어사가 파견되었다. 당시 암행어사는 정석진의 억울한 죽음에 대한 伸寃과 기우만에 대한 赦免 요구를 많이 받았다. 176) 이는, 호남지역 전기의병의 餘震이 계속 잠재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제3장 중기의병의 활동과 영향 전기의병이 종식된 후에도 호남지방의 유력한 유생들은 의병의 재봉기를 모색하였다. 奇參衍· 33 35쪽 참조. 171) 변상철·변만기, 『봉서·봉남일기』, 276·279쪽 및 이병수, 「금성정의록」, 90쪽 그리고 황현, 『매천야록』, 201쪽. 한편, 민종렬이 정석진과 함께 나주의병을 주도하였으며, 명성왕후 지지세력으로서 의병을 일으켰다는 주장도 있 다(이상찬, 박사학위논문, 59-60·160-162쪽 참조). 그러나 민종렬은 1896년 음력 2월말 담양에서 체포되어 서 울로 압송되었음을 알 수 있다(『潭陽郡邑誌』, 규장각 소장, 규 10784 : 『鄕史의 脈』 제4집<담양향토문화연구회, 1992>, 357-358쪽). 따라서 민종렬은 나주의병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고, 담양지역의 擧義와 관련된 것으로 보인 다. 특히, 동학농민혁명 당시 義兵統領을 지낸 담양 유생 具相淳과 나주목사로서 湖南招討使를 역임한 閔種烈은 「갑 오군공록」에 수록된 인물들이다(『동학란기록』 하, 713 720쪽). 이들이 담양에서 붙잡혀 처형되거나 서울로 압송 된 점만 보더라도 반동학적인 성향을 같이하는 이들이 담양을 중심으로 의병을 도모한 것으로 생각된다. 172) 이병수, 「금성정의록」, 『자료집』 3, 90쪽과 『난파유고』 권 4, 「鄭將軍傳」 참조. 173) 黃玹, 『梅泉野錄』 권 2(建陽元年 丙申), 201쪽 및 이병수, 「錦城正義錄」, 『자료집』 3, 90쪽, 그리고 『蘭坡遺稿』 권 4, 「蘭坡鄭公遺事」(李炳壽 撰)·「行狀」(吳駿善 撰) 참조. 당시 정석진이 처형되자, 그의 억울한 죽음에 비통해하는 나주 사람들이 성을 가득 메웠다고 한다. 174) 변상철·변만기, 『봉서·봉남일기』, 282쪽. 한편, 전주부 진위대가 군부에 보고한 내용에 따르면 김창균 김석현 父 子는 전남 보성에서 체포되어 조사를 받은 후 김창균은 本陣에서 砲殺되고, 김석현은 長城에서 梟首되었다고 한다 (독립신문 1897년 6월 2일자 「잡보」 ; 『독립신문』 제1권<독립신문영인간행회, 1991>, 98쪽). 175) 申箕善, 「奉使日記」, 『신기선전집』 하, 312쪽. 176) 정석진, 『난파유고』 권 3, 19-26쪽 및 변상철 변만기, 『봉서 봉남일기』, 31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