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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말의병 167 한편, 나주의병은 의병봉기의 배경과 정당성을 알리기 위하여 국왕에게 상소문을 올렸다. 153) 이들은 거병한 목적이 근왕에 있음을 알리고, 개화에 반대하는 입장 및 안종수의 잘못을 낱낱이 기록하여 상소한 것이다. 154) 그리고 이들은 의병의 목적은 개화파와 일본세력을 몰아내어 옛 제도를 복구하고 국왕의 환궁을 추진하기 위한 것이라고 역설하였다. 155) 요컨대, 나주의병의 거병 목표가 反開化·反侵略에 있음을 분명히 한 것이다. 또한 나주의병의 활동은 인근 郡邑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그리하여 咸平과 綾州·務安의 양반 유생들이 나중의병에 참여하였으며, 각 읍의 향리들도 대거 가담하였다. 156) 그 가운데 영광의 향리인 丁相燮은 주모자로 처형될 정도로 깊숙히 관여하였다. 157) 나주의병은 다른 지역의 의병과 통합을 시도하거나 연합에 노력하였다. 특히, 기우만이 이끄는 장성의병과는 각별한 관계를 유지하며 통합을 시도하였다. 물론 장성의병의 핵심인물인 기우만은 의진의 통합에 더욱 적극적이었다. 장성의병은 음력 2월 11일에 나주로 이동하여 나주향교에 두 의진이 집결하였다. 당시 장성의병은 기우만을 비롯한 高光洵 奇參衍 金翼中 李承鶴 奇周鉉 高琦柱 梁相泰 奇東觀 奇宰 奇東準 등 200여 명의 규모였다. 나주의병의 규모는 정확히 파악할 수 없으나 장성의병과 비슷하였으리라 짐작된다. 158) 그런데 이들은 지휘권의 문제로 갈등을 빚었다. 159) 즉, 장성의병은 이미 알려진 바와 같이 명문 유생들에 의해 주도되었고, 나주의병의 경우에는 대체로 향리층이 주도권을 행사하였기 때문에 양 세력간에 신분상의 갈등 가능성이 농후하였다. 하지만 나주의 유생들이 중재에 나섬으로써 그러한 문제는 어느 정도 해소되었다. 그 결과 기우만이 이끄는 장성의병은 湖南大義所, 이학상을 의병장으로 하는 나주의병은 羅州義所로 결정되었다. 음력 2월 14일 기우만과 이학상은 나주의 民庫에서 모든 將卒·義儒와 함께 의병으로서의 禮를 갖추었다. 아울러 이들은 임진왜란때 이름을 날린 金千鎰 의병장의 祠宇故址에 壇을 설치한 후 祭文을 바치고, 나주의 鎭山인 금성산에 위치한 錦城堂에서 祭祀지냈다. 160) 한편 정부에서 파견한 宣諭使와 관군이 의병을 해산할 목적으로 전주까지 내려왔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이에 기우만은 전주에 파견된 친위대에 勤王斥倭하자는 曉告文을 발송하였다. 또한 153) 이 상소문은 의병장 李鶴相을 대신하여 李炳壽가 지었는데, 中軍將 司果 李承壽가 그것을 전달하기 위하여 상경하 였다(이병수, 「금성정의록」, 『자료집』 3, 81-87쪽. 154) 이병수, 「금성정의록」, 『자료집』 3, 81-87쪽. 155) 위의 책, 81-83쪽. 156) 이병수, 「금성정의록」, 『자료집』 3, 79쪽. 한편, 보성의 유생 安極도 나주의병의 봉기에 직접 가담하지는 않았지만, 지지와 격려를 보내는 글을 의병장 李鶴相에게 보낸 바 있다(安極, 『晦隱集』 中, 권 2, 「與李注書鶴相擧義所」 참조). 157) 申箕善, 「奉使日記」, 『신기선전집』 하, 312쪽. 158) [부록]에 제시된 33명 외에도 상당수의 사람들이 나주의병에 가담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를테면 기우만의 답통 에 서명한 사람이 100여 명이나 되었으며, 나주 경내의 선비들이 음력 2월 10일 창의소가 설치될 때 동맹록을 작성 하였고, 그 후에도 인근 군읍에서 상당수의 양반유생과 향리들이 참여한 점에서 그러하다. 따라서 나주의병은 최소 한 100여 명 이상의 규모를 형성했으리라 판단된다. 159) 이병수, 「금성정의록」, 『자료집』 3, 76쪽. 160) 「송사집」, 『자료집』 3, 28쪽 및 이병수, 「금성정의록」, 『자료집』 3, 79-80쪽 참조.